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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고결하고 기품 있는 성품에 훈장을 수여한 명망 높은 가문 출신의 수재인 지강산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눈부신 존재였다. 4년의 열애 기간 동안 허서령이 그의 일생일대의 유일한 사랑임을 모두가 의심치 않았다. 그러다가 ‘양다리’ 사건이 터지면서 두 사람은 결국 이별했다. 5년 만에 다시 마주한 날, 지강산이 허서령을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두 눈에 원한이 들끓었다. “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영원히 사라졌어야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돌아온 건 그녀의 단호하고 깔끔한 대답이었다. “알았어요.” 지강산은 허서령을 뼛속까지 증오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녀에게 미쳐 있었고 그녀 앞에만 서면 속절없이 자제력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모든 진실이 드러났다. 지강산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허서령을 쳐다보면서 문으로 몰아붙였다. “평생 속죄하면서 살게. 너의 그 지독한 빚들 이제부턴 내가 다 감당할 테니까 나랑 결혼해.”
챕터 (1)
第1章
고결하고 기품 있는 성품에 훈장을 수여한 명망 높은 가문 출신의 수재인 지강산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눈부신 존재였다.
4년의 열애 기간 동안 허서령이 그의 일생일대의 유일한 사랑임을 모두가 의심치 않았다. 그러다가 ‘양다리’ 사건이 터지면서 두 사람은 결국 이별했다.
5년 만에 다시 마주한 날, 지강산이 허서령을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두 눈에 원한이 들끓었다.
“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영원히 사라졌어야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돌아온 건 그녀의 단호하고 깔끔한 대답이었다.
“알았어요.”
지강산은 허서령을 뼛속까지 증오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녀에게 미쳐 있었고 그녀 앞에만 서면 속절없이 자제력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모든 진실이 드러났다. 지강산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허서령을 쳐다보면서 문으로 몰아붙였다.
“평생 속죄하면서 살게. 너의 그 지독한 빚들 이제부턴 내가 다 감당할 테니까 나랑 결혼해.”
제1화
지강산과 함께한 4년은 허서령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이별 후 허서령은 5년을 울며 보냈다.
매일같이 눈물을 쏟은 건 아니었지만 지강산을 떠올리기만 하면 마음속에 장마라도 진 것처럼 축축하고 눅눅한 비가 내렸고 이내 눈시울도 뜨겁게 젖어 들곤 했다.
살면서 지강산을 다시 마주하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백시욱이 주선한 술자리.
떠들썩한 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석에 이끌리듯 허서령의 시선이 익숙한 얼굴에 닿았다.
그 순간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말 해일이라도 밀려온 것처럼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주변의 소음이 멀어지고 지강산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화이트 셔츠에 블랙 바지 차림의 지강산이 여전히 귀공자 같은 우아함을 풍기고 있었고 거기에 서늘한 분위기까지 풍겼다. 조각 같은 옆모습이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지강산이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싱그러운 소년미를 풍기며 따스하고 햇살처럼 밝게 웃어주던 소년이 눈앞에 나타났다. 허서령을 품에 안고 어리광을 부리던 게 마치 어제 있었던 일 같았다.
“서령아, 뽀뽀해줘.”
하지만 어제가 아니라 무려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젠 전생의 일처럼 아득했다.
허서령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저릿한 통증이 번졌다. 어느새 눈시울도 붉어졌다. 도저히 지강산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고 그냥 이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주춤거리던 허서령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룸을 나가려 했다.
“서령 씨.”
백시욱이 허서령을 불러 세웠다.
“오자마자 왜 그냥 가요?”
허서령이 멈칫하더니 문고리를 꽉 잡았다.
룸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허서령에게 쏠렸다. 오직 지강산만 예외였다. 휴대폰 화면을 넘기던 엄지손가락이 잠깐 멈칫했을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허서령이 숨을 길게 내뱉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첫사랑과의 재회가 너무나 당혹스럽고 민망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이 헤어질 때 다시는 안 볼 각오로 진흙탕 싸움을 벌이면서 헤어졌다.
“빨리 들어와요. 인혜도 곧 도착한대요.”
백시욱이 허서령을 재촉했다.
심인혜와 허서령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절친이었다. 지난달 소개팅으로 만난 백시욱과 첫눈에 반해 초고속으로 연애를 시작하더니 결혼 날짜까지 다음 달 중순으로 잡아버렸다.
오늘 이 자리는 백시욱과 심인혜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미리 안면을 트고 결혼식 축하 공연도 상의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심인혜의 계획은 들러리들이 춤을 추고 신랑 신부가 무대에서 사랑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돈독한 사이가 아니라면 이런 부탁을 들어주기 어려울 것이다.
허서령이 한참 동안 마음을 다잡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
백시욱이 반갑게 맞이했다. 손을 허서령의 등 뒤로 뻗긴 했지만 닿지는 않았다. 매너 있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허서령을 여자들 쪽 빈자리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지강산의 옆자리에 아름다운 여자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바로 지강산의 소꿉친구 소유하였다.
지강산과 연애하던 시절에도 소유하는 늘 허서령에게 적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했었다.
소유하의 눈빛이 지금도 날카롭기 그지없었고 허서령을 향한 혐오감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아니, 시욱 오빠, 아무 쓰레기나 들러리로 세워도 되는 거야?”
그 한마디에 룸 안에 정적이 흘렀다. 백시욱조차 당황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들의 모임에서 이토록 듣기 거북한 말이 나올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모두의 시선이 소유하에게 쏠렸다.
허서령도 소유하가 그녀를 욕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난감한 얼굴로 지강산을 쳐다봤다.
하지만 지강산은 계속 고개를 숙인 채 남의 일인 것처럼 휴대폰만 응시하고 있었다.
지강산의 뚜렷한 이목구비와 날카로운 턱선이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조명이 그의 짧은 머리끝에 걸려 옅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서늘함을 내뿜었다.
참다못한 한 여자가 불쾌해하며 나서서 한마디 했다.
“지금 누구한테 하는 소리예요?”
그러자 소유하가 건방진 태도로 말했다.
“내가 누구를 말하는지 허서령은 알고 있을 거예요.”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허서령에게 향했다.
허서령은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지만 거들먹거리거나 티를 내지 않았고 깊은 골짜기에 피어난 은방울꽃처럼 단아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리고 검고 부드러운 긴 머리를 뒤로 단정하게 묶었다. 공익 변호사인 그녀는 다정하고 선량해 보였으며 욕심이 없는 듯한 차분한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허서령을 아는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허서령의 내면과 겉모습이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지를.
사람들은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길래 만나자마자 ‘쓰레기’라고 욕하는지 궁금해졌다.
이런 모욕을 당했다면 허서령이 화를 내거나 반격하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소유하가 지강산을 대신하여 이러는 걸 알고 있었기에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지강산에게 있어서 허서령은 쓰레기 같은 존재였다.
백시욱이 어색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수습하려 애썼다.
“아, 원래 알던 사이였구나. 서령 씨는 우리 예비 와이프의 제일 친한 친구야. 예전에 무슨 원한이 있었든 오늘은 내 체면을 봐서라도 훌훌 털어버리고 화해하면 안 될까?”
소유하가 하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쟤랑 원한 같은 거 없어. 저런 걸레 같은 여자를 알지도 못하고. 강산 오빠가 쟤한테 원한이 있으니까 오빠한테 물어봐. 화해할 수 있는지.”
‘걸레 같은 여자?’
관계가 점점 복잡해졌다. 난감해진 백시욱이 억지 미소를 쥐어짰다.
“강산아, 서령 씨랑 아는 사이였어?”
사실 그가 묻고 싶었던 건 허서령에게 차였냐는 질문이었다.
허서령이 테이블 아래에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지강산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그 몇 초가 수능 시험을 치를 때보다 더 긴장됐다.
공기가 희박해진 듯 숨이 막혀왔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이 온몸을 조여왔다.
이름이 불린 이상 지강산도 더는 이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 느긋느긋 휴대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허서령을 쳐다봤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 안에 알 수 없는 소외감이 서려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야.”
지강산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온기라곤 전혀 없었다.
그 한마디가 허서령의 심장을 날카롭게 찔렀다. 아릿한 통증과 함께 실망감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지강산과 시선이 마주친 그때 허서령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주먹을 꽉 쥐고 서둘러 고개를 떨구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허서령은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다들 눈치 빠른 성인이라 감정과 표정만 봐도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백시욱이 정적을 깼다.
“오늘 결혼식에서 들러리를 서줄 친구들을 이 자리에 부른 건 서로 친해지게 하기 위해서야. 빨리 친해지려면 게임만 한 게 없지. 밥 먹기 전에 게임이나 한판 할까?”
젊은 사람들끼리 빨리 친해지고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면 진실 게임이 최고였다.
“나부터 시작할게...”
백시욱이 빈 술병을 테이블 중앙에 놓고 힘차게 돌렸다.
허서령을 제외한 모든 여자들이 술병이 지강산을 향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전하던 술병이 서서히 멈췄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술병이 지강산을 가리키자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와, 지강산이 걸렸어. 진실을 말하는 거랑 벌칙 중에 뭘 선택할 거야?”
지강산의 표정이 차분하기만 했다. 남들 앞에서 속마음을 드러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벌칙.”
백시욱이 쪽지를 하나 뽑더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종이 한 장 사이에 두고 여기에 있는 여자 한 명이랑 2분 동안 키스하기.”
지강산의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허서령이 허벅지 위의 바지춤을 꽉 움켜쥐었다. 하도 꽉 쥐어서 손가락 마디가 다 하얘졌고 가슴에 씁쓸함이 번졌다.
이곳에 남아서 이런 꼴을 당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극에 달했다.
그때 소유하가 환하게 웃으며 티슈 한 장을 뽑아 들었다.
“다들 포기해. 강산 오빠는 나랑 할 거니까.”
그러고는 입술 위에 티슈를 갖다 대고 지강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2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지강산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더니 단숨에 비워냈다.
뽑은 벌칙 대신 술을 택했다. 그 누구와도 키스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유하가 티슈를 던지면서 씩씩거렸다.
“재미없어, 정말. 뭐가 부끄럽다고 그래?”
지강산이 한숨을 무겁게 내뱉으며 술기운을 눌러 내렸다.
게임이 계속되었다. 술병이 여러 번 돌고 돌아 마침내 허서령의 차례가 왔다. 그녀는 벌칙이 지나칠까 봐 두렵기도 했고 술을 이길 자신도 없었다.
“진실을 말하는 걸 선택할게요.”
그러자 소유하가 기다렸다는 듯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내가 물어볼게. 허서령, 5년 전 그 일 후회한 적 있어?”
지강산의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새로 채워진 독주를 내려다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궁금증 가득한 눈빛으로 허서령을 쳐다봤다.
그 순간 허서령은 마음이 칠흑처럼 어둡고 깊은 구렁텅이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후회 안 해.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허서령의 목소리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소유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고 기분이 한결 좋아진 듯했다.
“자, 계속하자.”
바로 그때 지강산이 갑자기 앞에 놓인 독주를 집어 들더니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현장에 있던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대체 무엇 때문에 자진해서 벌주를 마신 걸까?
“계속들 놀아. 화장실 좀 다녀올게.”
지강산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허서령이 멀어지는 지강산의 뒷모습을 걱정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예전의 지강산은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도 않았고 술도 약했다.
‘방금 그 독한 술을 두 잔이나 마셔서 속이 엄청 안 좋을 텐데. 내가 왜 저 사람 걱정을 해? 이젠 옆에 소유하가 있잖아. 걱정해도 소유하가 해야지.’
허서령이 시선을 거두던 찰나 소유하의 날카롭고 분노 섞인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녀를 재수 없는 년이라고 욕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때 심인혜가 들어오면서 분위기가 다시 북적이기 시작했다.
떠들썩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달리 허서령은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는 동안 허서령은 어두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이상 기류를 눈치챈 심인혜가 허서령을 이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커다란 거울 앞, 허서령이 흐르는 찬물에 손을 씻었다. 심인혜가 립스틱을 덧바르며 거울 속의 풀죽은 허서령을 살폈다.
“오늘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야.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래.”
허서령이 티슈를 뽑아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손을 닦았다.
“거의 끝나가.”
심인혜가 안쓰러워하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가서 푹 쉬어.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 다 잘 될 거야.”
“응.”
허서령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침묵하다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인혜야, 너의 예비 남편이랑 지강산 씨 많이 친해?”
“꽤 친해. 지강산 씨 제산 사람인데 6개월 전에 그쪽 항공우주연구원에서 울심으로 발령받았어.”
심인혜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왜? 혹시 지강산 씨한테 관심 있어?”
허서령이 서둘러 해명했다.
“아니야. 그냥...”
“이해해, 이해해.”
심인혜가 다 안다는 듯 눈을 찡긋하며 말을 가로챘다.
“지강산 씨가 워낙 잘생기고 몸도 좋은 데다 명문대 출신에 항공 엔지니어잖아. 앞날이 창창하긴 하지.”
허서령은 더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한숨을 내쉰 뒤 젖은 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심인혜는 남부 지역에서, 허서령은 북부 지역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두 도시라 허서령이 대학교 때 4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어도 그 상대가 지강산인 건 알지 못했다. 오늘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줄 알고 심인혜가 충고를 건넸다.
“서령아, 너도 예쁘니까 지강산 씨랑 잘 어울리긴 하지만... 그 남자가 사는 세상이 우리랑 좀 달라. 우리 남편 말로는 지강산 씨 할아버지가 군복에 훈장을 주렁주렁 다신 분이고 제산 본가에 일등공신 현판까지 걸려 있대.”
“아버지는 정계 거물이고 어머니는 은퇴한 판사, 형은 마약 수사대 경찰, 여동생은 종군 기자, 큰아버지도 검찰청 요직에 계신대. 대단한 사람들만 모인 집안이라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옆에 소유하 씨도 있잖아. 내가 좋은 남자를 소개해주지 않는 게 아니라 네가 상처받을까 봐 그래.”
허서령은 심인혜의 말을 끝까지 덤덤하게 듣기만 할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5년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으니까.
심지어 지강산의 형이 순직한 게 아니라 신변 위협을 받아 대외적으로만 그렇게 발표하고 숨어 지내며 가족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4년을 연애했고 3년 넘게 동거하며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이였다. 연애 시절 지강산은 허서령을 자주 집에 데려가곤 했다.
지강산의 가족들 모두 품위 있고 선량하며 따뜻한 분들이라 가족 분위기도 아주 화기애애했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진심으로 잘해주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렇게 좋은 집안에 시집갈 복이 없었다.
대학교 때 지강산은 학교의 전설 같은 인물이었다. 재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성적도 항상 상위권이었고 외모까지 완벽했다.
모두가 우러러봤고 수많은 여학생이 밤잠을 설쳐가며 짝사랑하던 만인의 연인이었다.
그런 지강산에게 4년 동안 사랑을 받았으니 허서령은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두 사람이 긴 복도를 거닐었다.
허서령의 시선이 흡연실 앞 한적한 공간에 멈춘 그때 벽에 기대어 나른한 자세로 서 있는 지강산이 보였다. 지강산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길쭉한 손가락 사이에 타오르는 담배를 끼우고 있었다.
입가에 담배를 가져가 가볍게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내뱉자 정교하게 빚어진 얼굴 위로 뿌연 연기가 흩어졌다. 넓은 어깨가 무거운 짐이라도 진 것처럼 축 처져 있었다.
허서령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도저히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예전엔 담배라면 질색하던 그가, 생활 습관이 누구보다도 건강했던 그가 이제는 술과 담배를 모두 입에 댔다.
허서령과 심인혜가 흡연실을 거의 지나가던 그때 지강산이 쓰레기통 위의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더니 흡연실을 나와 복도 끝에 섰다.
서로 스쳐 지나가려는 찰나 지강산이 허서령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 모습에 충격에 빠진 심인혜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지강산과 허서령을 번갈아 봤다.
‘두 사람 뭐야? 첫 만남에 눈이 맞은 거야?’
허서령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이 굳어버렸고 불안한 눈빛으로 지강산을 쳐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깊게 가라앉은 지강산의 두 눈이 차갑고 날카로웠으며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얘기 좀 해.”
그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에 술기운이 배어 있었다.
“두... 두 사람 얘기 나눠.”
심인혜가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거의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허서령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지강산이 도망치는 심인혜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허서령을 잡고 흡연실 쪽으로 끌고 갔다.
흡연실도 사람들의 눈이 닿는 공공장소였다. 하지만 지강산은 멈출 기색이 없었다. 흡연실 옆에 있던 비상문을 밀어젖히고 허서령을 어두컴컴한 비상계단으로 끌고 가 벽 쪽으로 힘껏 내던졌다.
허서령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지강산이 그녀의 양쪽 어깨를 꽉 잡더니 고개를 숙여 거칠게 입을 맞췄다.
예상치 못한 입맞춤에 허서령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옅은 술 냄새와 좋은 솔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 어떤 예고도, 어떤 설명도 없었다.
지강산의 키스가 사나운 폭풍 같았다. 그 안에 처벌과 해소, 강압, 그리고 억눌린 분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읍...”
허서령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입술이 짓눌려 터질 것처럼 아팠다.
당황한 허서령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지강산의 단단한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제3화
지강산이 몸부림치는 허서령의 손목을 잡고 머리 위 벽에 고정시킨 뒤 이성을 잃은 맹수처럼 키스를 퍼부었다.
참아왔던 눈물이 허서령의 감긴 눈꺼풀 사이로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지강산은 멈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허서령이 그의 아랫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윽.”
날카로운 통증에 지강산이 입술을 뗐다.
허서령이 기억하는 지강산은 언제나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토록 사납게 구는 건 분명 그녀를 뼛속 깊이 증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생각에 허서령은 심장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지강산이 허서령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계속 짓눌렀다.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볼에 닿았다.
“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영원히 사라졌어야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지강산의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허서령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통증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허서령이 울컥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간결하게 답했다.
오직 그녀만 알고 있었다. 지강산이 그녀의 세상에서 단 한순간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는 것을.
어린 시절 너무 눈부신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남은 생이 외로워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문득 알 것만 같았다.
지강산이 허서령을 놓아주더니 기다란 손가락으로 깨물린 입술을 쓱 닦아냈다. 그러고는 일말의 미련도 없다는 듯 돌아서서 비상계단을 나갔다.
허서령이 맥없이 벽을 타고 주저앉았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고 입술 위에 지강산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다시 한번 심장이 부서져 내리는 고통에 한동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비상계단에서 마음을 추스른 뒤 볼에 흐른 눈물을 닦아내고 휴대폰을 꺼내 심인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일이 생겨서 먼저 갈게. 미안한데 내 가방 좀 퀵으로 보내줘.]
메시지를 보낸 후 벽을 짚고 일어나 고개를 들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다시 눈물을 훔쳤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다. 더는 지강산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인혜에게서 답장이 왔다.
[잘했어, 서령아. 지강산의 입술이 터진 거 봤어. 아주 격렬했나 본데? 잘했어.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는 건드려선 안 돼.]
허서령이 씁쓸하게 웃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텅 빈 것 같은 허망함을 안은 채 쓸쓸히 호텔을 떠났다.
...
밤이 깊어서야 모임이 끝이 났다.
한산한 대로변 위 노란 가로등 불빛이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지강산의 어두운 얼굴을 비췄다.
그의 입술에 생긴 상처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술을 마시지 않은 소유하가 운전대를 잡았다. 핸들을 꽉 쥔 그녀의 손가락 끝에 서슬 퍼런 분노가 서려 있었다.
소유하가 지강산의 입술을 힐끗 보더니 화를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울심이 얼마나 큰데 하필 거기서 그 여자를 만나다니.”
지강산이 고개를 돌려 공허한 눈빛으로 창밖의 풍경을 내다봤다. 소유하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소유하가 뜨끔했다.
“시욱 오빠한테 오빠가 어디 있는지 물어봤어.”
지강산이 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내 친구들 모임에 억지로 끼어들려 하지 마.”
“오빠, 허서령이 그 사람들이랑 아는 사이인 걸 알고 일부러 온 거야?”
짜증이 난 지강산이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소유하가 말을 이어갔다.
“허서령 걔 오빠를 배신하고 떠난 년이야. 설마 아직도 미련이 남아서 다시 잘해볼 생각인 건 아니지?”
지강산이 차갑게 말했다.
“서령이가 나한테 어떻게 했든 그건 내 일이야. 네가 함부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던 소유하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빠는 왜 아직도 걔 편을 들어? 그때 걔가 오빠한테...”
지강산이 말을 가로챘다.
“입 좀 다물래?”
그 말에 소유하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소유하는 지강산이 허서령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헤어질 당시 지강산이 울면서 무릎을 꿇었었고 이성을 잃고 무너졌었다.
허서령을 붙잡기 위해 늦가을 찬 바람이 불던 제산시의 빗속에서 일곱 시간을 꼬박 서 있다가 결국 실신해 병원에 실려 가기까지 했다.
허서령이 세상에서 가장 모진 말들을 쏟아내며 밀어내도 지강산은 계속 미친 듯이 매달렸었다.
결국 대학교 졸업 후 허서령이 모든 연락처를 바꾸고 제산시를 떠나고 나서야 두 사람의 지독했던 인연도 마침표를 찍었다.
...
“서령아, 우리 졸업하면 바로 결혼하자.”
“뭐가 그렇게 급해요?”
“사회에 나가면 유혹이 너무 많아. 우리 이쁜 서령이를 탐내는 놈들이 얼마나 많겠어.”
“걱정하지 말아요. 평생 강산 씨만 사랑할 거니까.”
“사랑한다면 나랑 결혼해줘. 마음을 놓게.”
“그래요. 졸업하면 바로 결혼해요.”
“결혼식은 어디서 하고 싶어?”
“난 바다가 좋아요. 햇살이 쬐는 모래사장 같은 곳에서 하고 싶어요.”
“네가 좋아하는 거면 나도 다 좋아. 그럼 우리 바닷가에서 결혼식 올리자.”
시끄러운 벨 소리에 허서령이 꿈에서 깨어났다.
암막 커튼 사이로 스며든 가느다란 햇살이 어두컴컴한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눈가가 축축한 걸 보니 또 과거의 꿈을 꾼 모양이었다.
휴대폰 화면에 진성호의 이름이 떴다. 허서령은 그 이름만 봐도 생리적인 거부감이 일었다.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간 뒤 잠기운을 억눌렀다.
“병원비 낼 때가 됐으니까 얼른 병원으로 와.”
진성호의 말투가 무척이나 강압적이었다.
“알았어.”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다음 휴대폰을 던지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5년 전 허서령의 아버지가 진성호의 아버지 진병철을 때려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들어갔다.
그녀의 아버지는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며 누명을 쓴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모든 증거와 증언이 아버지를 향했다. 게다가 사건 전날 아버지가 진병철과 크게 다투며 이런 폭언을 퍼부었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내일 네놈의 목숨줄을 끊어버릴 거야.”
명확한 살인 동기로 인해 아버지는 결국 22년형과 1억 6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진병철의 치료비도 전부 부담해야 했다.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아버지와 달리 진병철은 동네에서 악명이 자자한 건달이었다. 허서령은 아버지가 무죄라는 것을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허서령은 변호사가 되었다. 지난 몇 년간 재심을 청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조사하고 새로운 증거를 수집했다.
허서령은 반드시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주리라 다짐했다.
제4화
병원 안.
허서령이 수납을 마치고 영수증을 챙겨 병원을 나섰다. 그때 진성호가 뒤쫓아와 허서령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지난번에 내가 얘기했던 거 생각해 봤어?”
허서령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진성호의 손을 뿌리치며 째려봤다.
“미친놈.”
진성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지더니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고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
“허서령, 나한테 시집오면 배상금 1억 6천만 원을 주지 않아도 돼. 우리 아버지 병원비도 낼 필요 없고. 게다가 너의 엄마가 원하는 대로 은행에서 1억 원 대출받아 예물로 줄게. 우리 두 집안끼리 얽힌 지긋지긋한 악연도 이걸로 다 끝내는 거야.”
허서령은 진성호와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를 쳐다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발걸음을 옮기자 진성호가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다시 허서령의 팔을 잡고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네 엄마도 동의했는데 대체 언제까지 콧대를 세울 거야?”
허서령이 버럭 화를 냈다.
“그럼 우리 엄마랑 결혼하든가.”
화가 난 진성호가 입을 파르르 떨었다. 허서령을 반드시 손에 넣겠다는 듯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이며 그녀의 뒷머리를 잡고 앞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널 눈여겨본 걸 너의 복인 줄 알아야지.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으니까 거절도 적당히 해. 그때 가서 감당 못 하겠다고 울지 말고.”
더러운 손이 뒷머리에 닿은 순간 헛구역질이 밀려왔다. 허서령이 그를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은 법치 사회야. 내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썩게 할 수도 있어.”
“흥. 법으로 날 협박할 생각 하지 마.”
진성호가 콧방귀를 뀌며 건방진 태도로 말했다.
“너의 아버지가 우리 집에 진 빚을 딸인 네가 몸으로 갚는 게 뭐가 어때서? 지극히 공평하다고 생각하는데?”
허서령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아빠는 무죄야.”
반드시 재심을 청구하여 진실을 밝힐 생각이었다. 배상금은 한 푼도 주지 않을 것이고 이미 지불한 병원비도 전부 돌려받을 것이다. 5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기에 법원에도 배상을 청구하리라 마음먹었다.
진성호가 대놓고 비웃었다.
“22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아직도 무죄 타령이야?”
허서령이 진성호의 손을 힘껏 밀쳐냈다.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뒤에서 진성호의 분노 섞인 고함이 울려 퍼졌다.
“허서령, 넌 내 거야. 절대 도망 못 가.”
귀가 오염된 것 같은 불쾌감에 허서령이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법도 모르는 무식한 인간을 상대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
일주일 뒤 새벽 한 시.
깊은 잠에 빠졌던 허서령이 요란하게 울려대는 휴대폰 소리에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휴대폰을 더듬더듬 찾아 화면을 밀어 귀에 갖다 댔다.
“여보세요...”
“서령아, 나 결혼 안 해. 엉엉... 백시욱이랑 헤어질 거야...”
휴대폰 너머로 술에 취한 심인혜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순식간에 깬 허서령이 벌떡 일어나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디야? 술 마셨어?”
결혼식을 불과 보름 앞둔 시점이었다. 혼인신고를 마쳤고 청첩장도 다 돌렸다. 웨딩 촬영, 식장 예약까지 다 끝낸 마당에 파혼이라니. 무슨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허서령이 급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금 어디야?”
“밤의 온도.”
“거기서 기다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지금 바로 갈게.”
허서령이 서둘러 옷장을 열어 옷을 꺼내 입었다.
그녀가 숨 가쁘게 달려간 술집의 룸 안에 백시욱도 함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만취한 상태로 2m 정도 거리를 둔 채 소파 양 끝에 주저앉아 있었다.
“서령아...”
허서령을 본 심인혜가 울면서 손을 내밀었다. 술 때문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눈물범벅이었고 아직도 울먹거리고 있었다.
“나 이 사람이랑 끝낼 거야. 제발 나 좀 데려가 줘. 다시는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아.”
허서령이 가방을 내려놓고 심인혜의 옆에 앉아 휴지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너무 감정적으로 굴지 말고 일단 술 깨고 나서 다시 얘기해.”
그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백시욱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지강산, 왔어?”
그 소리에 허서령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고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검은 셔츠와 검은 바지 차림의 지강산이 차갑고 고귀한 아우라를 풍기며 서 있었다. 그의 깊고 어두운 두 눈이 허서령에게 머물러 있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허서령은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고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주 그에게 강제로 입맞춤 당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지강산의 입술 상처는 아물었을지 몰라도 그녀의 가슴 속 상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백시욱이 휘청거리며 지강산에게 기대자 지강산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인혜가 나랑 헤어지겠대.”
그가 심인혜를 가리키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이 여자 진짜 양심도 없지 않냐?”
하지만 지강산의 시선은 심인혜가 아니라 허서령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서늘한 눈빛에 허서령은 마음이 씁쓸해졌다.
“맞아. 양심이 없어.”
지강산의 목소리가 지극히 낮고 무거웠으며 한겨울 서리처럼 차가웠다.
허서령이 켕기는 게 있는 듯 지강산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심인혜를 부축해 일으키며 그녀와 심인혜의 가방을 챙겼다.
“인혜야, 집에 가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심인혜를 부축한 채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술집을 나와 택시를 탔다.
“인혜야, 너의 엄마 집으로 데려다줄게.”
허서령이 심인혜를 끌어안고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넘겼다. 엄마 집으로 데려다주겠다는 소리에 심인혜가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싫어. 엄마한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속상해하실 거란 말이야.”
“그럼 우리 집으로 가.”
“아니야. 네가 쉬는 데 방해돼. 그냥 신혼집으로 데려다줘.”
“하지만 시욱 씨도 그리로 갈 텐데. 밤에 또 싸우면 어쩌려고.”
심인혜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분노를 쏟아냈다.
“그 사람은 아직 젖도 못 뗀 애야. 엄마 집으로 돌아가라, 신혼집엔 절대 못 들어와.”
허서령이 두 사람이 싸운 이유를 대충 짐작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단둘이 산 백시욱과 달리 심인혜는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공주처럼 자랐기에 자유로운 삶을 원했다. 그런 그녀가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걸 절대 동의할 리가 없었다.
결국 허서령은 심인혜를 그들의 신혼집에 데려다주었다. 아파트가 편안하면서도 아늑했다.
집으로 들어가 심인혜를 침대에 눕히고 신발과 양말을 벗겨주었다. 그다음 따뜻한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정성스레 화장을 지워준 뒤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혔다.
머리맡에 숙취해소제와 내일 아침에 신을 슬리퍼까지 챙겨놓았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허서령이 급히 방 밖으로 나갔다. 지강산이 인사불성이 된 백시욱을 부축해 들어오고 있었다.
지강산은 백시욱을 소파에 던지고는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친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허서령이 황급히 방 안으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고 긴장감과 당혹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던 지강산의 경고가 떠올랐다.
잠시 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허서령은 한참을 숨을 죽이고 기다리다가 밖이 완전히 조용해진 뒤에야 조심스럽게 방을 나왔다.
지강산이 이미 떠나고 없었다.
소파에 널브러진 백시욱을 보고 있자니 가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남자들은 참 무심하단 말이야. 집까지 데려다줬으면 이불이라도 좀 덮어주고 가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허서령이 이불장에서 이불을 꺼내 백시욱에게 덮어주었다.
시간이 어느덧 새벽 두 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감에 허서령은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서둘러 짐을 챙겨 지친 몸을 이끌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런데 문이 닫힌 순간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는 놀란 나머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다가 등이 현관문에 부딪혔다. 허둥지둥 문고리를 돌려봤지만 문이 이미 굳게 잠겨 있었다. 도망갈 길이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었고 숨도 가빠왔으며 긴장감에 마른침을 연신 삼켰다.
지강산이 현관문 앞에서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그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더니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로 허서령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제5화
허서령은 진심으로 겁이 났다.
지난번 사람들이 북적이는 호텔에서도 허서령에게 키스를 퍼부었던 지강산이었다.
지금은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인 데다가 아파트 복도에 인적도 끊겼다. 지강산이 또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강산 씨도 여기에 올 줄은 몰랐어요.”
허서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현관문에 몸을 바짝 붙였다. 당장이라도 문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칠 기세였다.
“강산 씨 눈앞에 일부러 나타난 게 아니에요.”
지강산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말없이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걸어가더니 피우던 담배를 비벼 꺼서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린 그때 허서령을 돌아보며 무심하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안 가?”
허서령이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다가갔다.
‘다시 미친 짓을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날 기다렸던 거야?’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구석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고 지강산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지강산의 키가 훤칠했고 짧게 자른 머리가 아주 깔끔했으며 뒤통수마저 참 예뻤다. 그리고 어깨가 넓고 허리가 좁은 데다가 몸매까지 다부져서 옷을 입으면 날씬하고 맵시가 있어 보였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안정되었다.
예전의 허서령은 지강산이 요리를 할 때마다 몰래 백허그를 하는 걸 좋아했다. 그의 넓은 등에 얼굴을 파묻으면 편안하고 마음이 놓였다.
그럴 때면 지강산이 웃으며 묻곤 했다.
“이렇게 매달려 있으면 요리를 어떻게 해?”
허서령이 애교를 부렸다.
“손은 안 잡았잖아요. 강산 씨는 요리해요. 난 이렇게 안고 있을 테니까.”
“네 몸이 얼마나 말랑거리는지 잊었어? 자꾸 이러면 나 속이 근질거려서 밥이 아니라 널 먹고 싶어져.”
“요리나 해요. 엉뚱한 소리 그만하고.”
지강산이 농담으로 끝내는 법이 없었다. 하던 일을 멈추고 허서령을 번쩍 들어 아일랜드 식탁 위에 앉힌 다음 ‘처벌’을 내리곤 했다. 만족할 만큼 그녀를 탐한 뒤에야 기진맥진한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히고 다시 식사 준비를 했다.
예전에는 이토록 달콤했었는데 추억하는 지금은 쓰디쓰기만 했다.
허서령이 더는 지강산의 뒷모습을 보지 않고 고개를 떨구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후에도 두 사람은 아무 대화도 하지 않고 나란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지강산의 차가 아파트 단지에 세워져 있었는데 허서령이 그의 차 옆을 그냥 지나가려 했다.
“타.”
뒤에서 들려온 지강산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허서령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지강산이 운전석 문을 잡고 서서 차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허서령을 쳐다보는 얼굴이 무표정했고 눈빛이 서늘했으며 목소리에도 그 어떤 온기가 섞여 있지 않았다.
“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 고마워요.”
허서령은 여전히 그가 두려웠다.
“타라고.”
그의 말투가 조금 더 세졌다.
“정말 괜찮아요. 난...”
“세 번 말하게 하지 마.”
허서령이 멍하니 선 채 의아한 눈빛으로 지강산을 쳐다봤다.
‘무슨 뜻이지?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지강산이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차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안전벨트를 한 뒤 허서령이 타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허서령도 잘 알고 있었다. 지강산이 그녀를 아무리 미워하고 혐오한대도 그가 좋은 남자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강산의 성품과 교양이라면 새벽 두 시가 넘은 심야에 여자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더 망설이지 않고 뒷좌석 쪽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당겼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힘껏 당겨보았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지강산이 조수석 쪽으로 몸을 숙이더니 팔을 뻗어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반듯하게 고쳐 앉았다. 동작이 군더더기 없이 매끄러웠다.
허서령은 열린 조수석 문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체념한 듯 조수석에 타고 안전벨트를 맸다.
비좁은 차 안에 두 사람밖에 없었다. 차 안을 감도는 은은한 라벤더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허서령이 좋아하던 향이자 지강산도 즐겨 쓰던 향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허서령이 안절부절못했다. 지강산의 체취가 그녀를 휘감은 듯한 기분에 가슴이 요동쳤고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차 안의 불이 꺼지고 지강산이 시동을 걸어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그가 내비게이션을 클릭하며 짧게 말했다.
“주소.”
“아...”
허서령이 손을 뻗어 화면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지강산이 화면을 힐끗 쳐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가는 내내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잔인할 만큼 더디게 흘렀다. 허서령에게 1분 1초가 고문과도 같았다.
차마 지강산을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 창밖의 야경만 내다봤다. 심장이 계속 쿵쾅거렸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공기마저 점점 희박해지는 것 같았다.
5년 만에 다시 앉게 된 그의 조수석이 이토록 가시방석 같을 줄은 미처 몰랐다.
예전에 지강산이 수업을 마친 허서령을 데리러 갈 때마다 늘 요구르트 같은 간식거리를 사 가곤 했다.
깔끔한 성격의 지강산이었지만 허서령이 차 안을 어질러 놓는 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차 안에서 간식을 먹으며 지강산에게 먹여주기도 했다.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는 것이든 허서령이 주는 거라면 독약이라도 먹을 수 있었다.
40분 후 차가 울심시 외곽인 낡은 3층짜리 아파트 앞에 멈춰 섰다.
주변의 가로등이 무척 어두웠고 골목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다 왔어요. 고마워요.”
허서령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지강산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가 차에서 내려 차 앞을 돌아 허서령에게 다가가더니 낡은 건물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여기서 살아?”
순간 움찔한 허서령은 대답하지 않고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누런 가로등 불빛이 지강산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비췄다. 안색이 말이 아니게 굳어졌고 약간의 분노도 섞여 있었다.
가슴에 돌덩이가 막힌 듯 가슴이 답답해진 그가 무거운 숨을 내쉰 뒤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허서령, 이게 네가 말하던 행복한 삶이었어?”
허서령은 갑자기 마음이 저렸다. 지강산이 뒤이어 어떤 말을 쏟아낼지 짐작한 듯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속상할까 봐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강산이 빠르게 뒤따라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다시 끌어당겼다.
지강산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허서령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마음에 씁쓸함이 밀려왔다. 그뿐만이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버려져 살려달라고 발버둥 치는 기분이었다.
“허서령, 너 이거밖에 안 되는 여자였어?”
지강산의 낮고 거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했다.
“고작 이렇게 살려고 그때 날 배신하고 그 남자를 따라갔던 거야? 그 남자는 어디에 있어? 널 실컷 가지고 놀다가 버리기라도 한 거야?”
“이거 놔요.”
허서령이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목구멍이 칼날에 베인 것처럼 아려와 말을 잇기 힘들었다.
사실 그녀는 무척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과거 명문대 금융학과를 졸업하고 제산시에서 고액 연봉을 받으며 훌륭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던 허서령이었으나 지금은 공익 변호사로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았다. 게다가 거액의 빚까지 짊어진 채 외곽의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고단했다.
예전에 헤어질 때 내뱉었던 변명들이 이제 고스란히 되돌아와 허서령을 힘들게 했다. 자업자득이라 울 자격조차 없었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면서 밀려온 고통에 온몸이 다 떨렸다.
“제발 나 좀 놔줘요.”
지강산이 대놓고 비웃었다.
“그 남자 그래도 재벌 2세는 된다고 들었는데 그 남자한테서 아무런 이득도 못 챙긴 거야?”
허서령이 손목을 빼내려 애를 썼지만 지강산이 꽉 잡고 있어 벗어날 수가 없었다. 손목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눈을 감자 눈물이 창백한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두컴컴한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수척한 얼굴을 비추었다. 연민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지강산은 허서령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턱을 잡고 강제로 들어 올린 다음 또박또박 말했다.
“5년이야. 이 예쁜 얼굴이랑 몸매로 마음만 먹으면 돈 많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나서 팔자를 고칠 수 있었을 텐데. 어쩌다가 이 꼴이 됐어?”
허서령이 흐릿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나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산 씨, 날 모욕하면 화가 조금이라도 풀려요?”
지강산이 코웃음을 쳤다. 희미한 불빛이 그의 차가운 얼굴에 드리워졌고 짧은 머리카락의 그림자가 붉게 충혈된 눈을 가렸다.
그가 허서령의 옷깃을 잡아챘다. 분노가 치솟아 짙은 증오심을 담아 말했다.
“나랑 자면 돈도 주고 집도 주고 차도 줄게.”
극도로 분노한 나머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려 허서령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허서령의 흰 셔츠 단추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옷이 벌어지면서 하얀 어깨와 글래머한 가슴이 절반 드러났고 하얀 속옷이 살짝 보였다.
지강산의 두 눈이 급격하게 흔들리더니 주먹을 꽉 쥐고 침을 꿀꺽 삼켰다.
허서령은 더 이상 저항할 기력조차 없었다. 얼굴이 눈물범벅이 돼버렸고 영혼이라도 잃은 듯 공허한 눈빛으로 지강산을 쳐다봤다.
“필요 없어요.”
지강산이 허서령을 놓아주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중얼거렸다.
“한심한 놈.”
이건 자신에게 하는 욕이었다.
그 말이 허서령의 귀에 유독 날카롭게 박혔다.
지강산의 얼굴이 섬뜩할 정도로 험악해졌다. 몸을 돌려 차에 올라탄 뒤 차 문을 세게 닫고 가장 빠른 속도로 휙 가버렸다.
허름한 골목이 다시 깊은 정적에 잠겼고 어두운 밤에 쓸쓸함이 더해졌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린 허서령이 휘청거렸다. 눈물 젖은 눈으로 멀어지는 지강산의 차를 바라보면서 흐트러진 옷깃을 바로잡았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숨쉬기조차 버거웠다.
지강산을 만난 이후 정말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이제 어디로 숨어야 한단 말인가?
제6화
다음 날.
업무를 마친 허서령이 휴대폰을 들어 심인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인혜야, 깼어?]
[어, 깼어.]
[시욱 씨랑은 어떻게 됐어?]
[얘기 잘 끝냈어. 시욱 씨가 양보하기로 해서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해.]
[미안해서 어떡하지? 지금 손에 엄청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거든. 다음 달에 출장 가야 할 것 같아. 들러리 못 서줄 것 같은데... 이번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양쪽의 비주얼 담당 두 사람이 다 못 온다고? 둘이 짰어?]
[그게 무슨 소리야?]
[지강산 씨도 일이 생겨서 못 온대.]
지강산 역시 허서령을 만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서령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울심시가 넓고 사람도 많았다. 마음먹고 피하기만 한다면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허서령도 바빴고 지강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평행선처럼 영원히 접점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실제로도 일부러 그를 피했다.
심인혜와 백시욱이 주선한 자리는 모두 핑계를 대고 거절했고 친구들이 부를 때마다 누가 오는지 낱낱이 확인하며 지강산과 마주칠 가능성을 원천 봉쇄했다.
그렇게 보름 뒤.
변호사 나정민이 서류 한 뭉치를 들고 허서령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허변, 이 사건 의뢰인이 꼭 허변한테 사건을 맡기고 싶다네요.”
허서령이 서류를 받아 대충 훑어보았다.
“상표권 침해 소송요? 나변, 이건 제 전문 분야가 아닌데요? 전 공익 쪽을 위주로 맡고 있고 이런 상업 소송은 나변 담당이잖아요.”
“그쪽에서 꼭 허변한테 맡기고 싶다는데 어쩌겠어요.”
나정민이 검은 뿔테 안경을 올리면서 감탄 섞인 말투로 덧붙였다.
“수임료를 무려 30%나 더 주겠다는데 내가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건...”
“허변 능력을 믿어요.”
“알겠어요. 한번 해볼게요.”
“의뢰인 집 주소니까 바로 가보세요.”
“집으로요?”
“네, 집으로.”
...
에버그린 힐.
울심시에서 손꼽히는 최고급 주택이자 고소득 전문직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항공우주연구원과도 차로 불과 10분 거리였다.
보안이 매우 철저하여 신원 확인과 전화 문의를 거친 후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겨우 목적지에 도착한 허서령이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린 순간 허서령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소유하였다. 실크 슬립 차림에 긴 머리를 늘어뜨렸고 짙은 메이크업을 해서 그런지 더욱 요염해 보였다.
“들어와. 문은 안 닫아도 돼.”
상업 소송을 굳이 공익 변호사에게 맡긴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모든 의문이 그제야 풀렸다.
소유하가 허서령을 곤란하게 만들고 모욕할 기회를 만들고 싶어서 그녀에게 맡겼던 것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허서령은 그녀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끝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허서령이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신발장 앞에 놓인 남성용 검은색 슬리퍼가 눈에 들어왔다. 소유하가 신고 있는 것과 같은 디자인의 커플 슬리퍼였다.
소유하가 무심한 척 말했다.
“이건 강산 오빠 슬리퍼니까 신발장 안에서 새것 꺼내 신어.”
‘지강산이랑 동거 중이야?’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순간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팠다.
‘그나저나 신발은 신발장 안에 넣어둬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보란 듯이 꺼내놓았다는 건 나한테 보여주기 위해서겠지.’
허서령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신발장을 열어 새 슬리퍼를 꺼내 신었다. 의뢰인을 상대하는 자리라 일단 예의 바르게 대했다.
“소유하 씨, 저는...”
업무적인 태도로 대화를 시작하려던 그때 소유하가 말을 가로챘다.
“소개할 필요 없고 쓸데없는 얘기도 할 필요 없으니까 일단 앉아.”
소유하가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하얀 다리를 꼬고 한 손으로 머리를 지탱했다. 긴 웨이브 머리가 소파 뒤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빛에 경멸과 비웃음이 가득했고 태도 또한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허서령이 마음을 가라앉히며 옆에 앉아 노트북을 폈다.
“소유하 씨, 의뢰하신 상표권 침해 사건에 대해...”
소유하가 또 한 번 말을 끊고 티테이블을 가리켰다.
“목 좀 축여. 미리 커피 타 놨으니까.”
티테이블 위에 컵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그중 두 개는 커플 컵이었다. 이토록 유치하고 노골적인 수작에 허서령은 어이가 없었다.
상표권 침해 사건도 왠지 소유하가 지어낸 거짓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컵은 건드리지 마. 강산 오빠 거니까.”
소유하가 커플 컵을 들고 웃으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허서령을 쳐다보며 승리감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허서령이 가볍게 웃었다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더는 이런 저급한 연극을 참아줄 이유가 없었다.
“소유하 씨, 이제 그만하시죠. 사건은 핑계고 날 모욕하는 게 진짜 목적이 아닌가요?”
그러자 소유하가 기다렸다는 듯이 가면을 벗어던지더니 콧방귀를 뀌고 비아냥거렸다.
“허서령, 너 같은 쓰레기도 결국 천벌을 받는구나. 강산 오빠 버리고 떠나서 대단한 재벌 2세라도 만날 줄 알았더니. 금융학과에서 잘나가던 수재가 고작 이런 작은 법률 사무소에서 공익 변호사나 하고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 이러고 보면 하늘이 참 공평해.”
허서령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의 오만한 태도를 지켜보았다.
소유하가 말을 이었다.
“그때 강산 오빠가 너 같은 근본 없는 애를 만나준 것만으로도 조상님이 도운 줄 알았어야지. 감히 양다리를 걸쳐? 그러니까 지금 버림받은 신세가 된 거야. 네가 떠나고 나서 오빠는 나랑 만나기 시작했어. 우린 지금 너무 행복해.”
허서령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 약간의 연민이 섞여 있었다.
“소유하, 세상을 보는 시야가 여전히 좁구나.”
“뭐라고?”
소유하의 안색이 확 어두워진 걸 볼 허서령이 차분하게 반격했다.
“네 눈에는 남자, 금수저, 명분 그런 것밖에 안 보이지? 한낱 일개미가 자기가 옮긴 똥 덩어리가 제일 크다고 자랑하는 것 같아. 하지만 난 지금 이 자리에서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고 절차적 정의와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드는 판례들을 보고 있어.”
그녀가 웃음을 거두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유하를 쏘아보았다.
“굳이 남자한테 기대어 내 가치를 증명할 필요 없어. 공익 변호사가 뭐 어때서? 내가 맡은 사건 하나하나가 이 사회의 공정함을 수리하고 있어. 그런데 넌 내가 오래전에 버린 과거와 그 남자를 붙들고 있는 것 말고 뭐가 있는데?”
소유하가 얼굴이 흙빛이 된 채 주먹을 꽉 쥐고 일어나 허서령을 노려봤다.
허서령을 제대로 밟아주려고 집으로 부른 것이었는데 오히려 그녀가 처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그때 현관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유하가 급히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허서령이 서류와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열려 있는 문틈으로 밖의 대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오빠, 퇴근했어? 내가 국 끓여놨는데 얼른 가서 먹어.”
지강산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됐어. 저녁 먹고 왔어.”
“다 끓여놨는데 버리면 아깝잖아. 내가 12시간이나 정성 들여 끓인 거라고.”
허서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지강산을 피했는데 결국 소유하 때문에 또 만나고 말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소파 옆 쓰레기통에 담긴 진씨네 영양탕 포장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소유하에게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온 지강산이 현관에서 허서령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친 순간 모두 돌처럼 굳어버렸다.
제7화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정적이 내려앉았다. 주변의 소음이 잦아들고 세상의 색채가 빛을 잃어가는 가운데 오직 지강산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연한 블루 반팔 셔츠에 블랙 바지 차림의 지강산이 청량하면서도 멋진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평범한 출근룩이었음에도 조각 같은 이목구비, 탄탄한 몸매와 훤칠한 키 덕분에 우아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
그가 깊고 어두운 눈으로 빤히 쳐다보자 허서령은 저도 모르게 긴장감에 휩싸였다.
소유하가 슬리퍼를 가져와 지강산의 앞에 놓으며 살갑게 굴었다.
“오빠, 신발 갈아 신어.”
하지만 지강산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허서령만 빤히 쳐다봤다. 소유하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상표권 침해 사건 때문에 친구한테 법률 사무소를 소개받았는데 거기서 얘를 보낼 줄은 몰랐어.”
허서령이 미간을 찌푸리며 분노 섞인 눈빛으로 소유하를 째려봤다.
‘내가 올 줄 몰랐긴 개뿔.’
지강산이 소유하를 돌아보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상표권을 따질 회사가 어디 있어?”
당황한 소유하가 멋쩍게 웃었다.
“어... 그게...”
“그럼 이만 가볼게.”
허서령은 가슴을 조여오는 답답함에 단 1초도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강산이 신발장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바람에 신발을 갈아 신을 수가 없었다.
“그래. 가봐.”
소유하가 다시 오만한 태도로 비아냥거렸다.
“업무 능력도 별로인 것 같고 전문성도 떨어져서 이런 사건을 너한테 맡기기엔 좀 불안해.”
‘웃겨서 원. 회사도 없으면서 상표권은 무슨.’
당하고만 있을 허서령이 아니었다.
“내 전문성은 법과 사실을 존중하는 데서 나와. 회사도 없는 ‘고객’의 허영심을 채워주기 위해 모욕을 견뎌주는 건 내 업무가 아니야. 오늘 수임료는 초 단위로 계산해서 청구할 거야. 이따가 청구서 보낼 테니까 확인하는 대로 입금해.”
그러고는 지강산과 소유하 사이를 거칠게 비집고 들어가 팔꿈치로 지강산의 가슴팍을 힘껏 밀쳐냈다.
“좀 비켜주시죠.”
허서령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지강산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쳐다봤다.
소유하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허서령, 지금 이게 무슨 태도야?”
허서령은 대꾸도 하지 않고 신발을 갈아 신은 뒤 문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이대로 가기엔 억울함이 가시지 않아 다시 돌아서서 소유하에게 말했다.
“아, 아까 그 진씨네 영양탕 있잖아. 그 집 정통 맛집도 아니고 12시간이나 끓이지도 않아. 다음엔 서쪽에 있는 양씨네 영양탕으로 가 봐. 그 집 아주 제대로니까.”
소유하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하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어금니를 깨물면서 허서령을 노려보았다.
“너!”
그때 지강산의 입가에 남들이 알아차리기 어려운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소유하가 폭발하기 전에 허서령이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얼굴이 잿빛이 된 소유하를 보니 가슴 속 응어리가 그나마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거센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올 때 숨이 막힐 정도로 덥고 습하긴 했지만 그래도 하늘은 맑았었다.
‘어떡하지?’
허서령이 가방 안을 뒤져봤으나 우산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검은 구름이 하늘 전체를 뒤덮었고 미친 듯이 불어대는 강풍에 단지 내 가로수들이 마구 휘청거렸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확인해보니 오늘 아침부터 태풍 경보가 여러 차례 발령되어 있었다. 업무에 치여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울심시가 바다와 가까워 태풍이 자주 불었다. 지금 당장 떠나지 않으면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이곳에 완전히 발이 묶일 판이었다.
서류 가방이 다행히 방수 재질이었다. 몸이야 젖어도 괜찮았다.
허서령이 결심한 듯 휴대폰을 가방에 넣은 뒤 이를 악물고 빗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폭풍우와 태풍의 위력을 너무 얕잡아 보고 말았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가려주는 게 사라진 바람에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했다. 강한 바람 때문에 똑바로 걷기는커녕 몸이 자꾸만 옆으로 쏠렸다.
장대비가 온몸을 때려 아팠고 찬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온몸이 흠뻑 젖었고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몸이 가냘픈 데다가 다리에 힘까지 풀린 허서령은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잔디밭 위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비바람이 너무 거셌고 추위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안간힘을 써서 다시 일어났지만 몇 발자국 내딛기도 전에 또다시 넘어졌다.
그녀는 한 손으로 서류 가방을 꽉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 옆에 있던 나뭇가지를 붙들었다. 다시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 갑자기 누군가 허서령의 허리를 껴안았다.
상대가 확 잡아당기자 그녀의 몸이 붕 뜨면서 등이 따뜻하고 단단한 가슴팍에 빈틈없이 밀착되었다. 남자의 품 같았다.
남자가 등 뒤에서 허서령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발이 공중에 뜬 채 힘없는 인형처럼 남자에게 안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발걸음이 거센 바람 속에서도 놀랄 만큼 침착하고 힘이 있었다. 체격이 워낙 건장하고 크다 보니 이 정도 바람 따위는 그를 흔들지 못했다.
다시 1층 로비 안으로 들어오자 허서령은 그제야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자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허서령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추위에 몸을 떨었다. 한 손에 서류 가방을 잡고 다른 손으로 얼굴과 눈에 묻은 빗물을 닦으면서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태풍에 날아갈 뻔했어요. 진짜 고마워요.”
“평소 밥도 안 먹고 다녀? 왜 이렇게 야위었어?”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그 속에 차가움과 분노도 섞여 있었다.
순간 움찔한 허서령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봤다.
익숙한 목소리와 낯익은 얼굴...
‘지강산?’
넋이 나간 나머지 미처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지강산 역시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젖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손을 들어 젖은 얼굴을 닦더니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허서령을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밖에 바람이 불고 비도 오고 난리인데 뛰쳐나가면 어떡해?”
허서령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태풍이 한 시간 뒤에 상륙한대요. 지금 안 가면 더 못 갈 것 같아서...”
지강산이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봤다.
“지금 부는 바람도 널 충분히 날려버릴 것 같은데.”
“저기 혹시 차로 우리 집까지만 태워다줄 수 있어요?”
허서령의 뻔뻔한 질문에 지강산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다음엔?”
“네?”
‘무슨 그다음?’
허서령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널 데려다주고 나면 태풍이 상륙할 거고 거리 전체가 물바다가 될 텐데. 내가 너희 집에 갇히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생각 없는 소리를 했는지 깨닫고 서둘러 사과했다.
“미안해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지강산의 눈빛이 점점 뜨거워졌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문밖의 빗줄기를 쳐다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가자. 올라가서 젖은 옷부터 갈아입어.”
지강산과 소유하의 동거 생활을 다시 봐야 한다는 생각에 허서령은 마음이 괴로워졌다. 그저 그들과 멀리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차라리 여기서 추위에 떨며 옷이 마르길 기다릴지언정 그런 모습을 보고 괴로워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방금 소유하의 거짓말을 까발렸는데 소유하가 허서령을 다시 들여보내 줄 리도 만무했다.
“왜 이렇게 고집불통이야?”
지강산이 불쾌함을 드러냈다.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흠칫 놀란 허서령이 고개를 들어 지강산을 쳐다봤다. 그제야 말을 하는 내내 지강산의 시선이 문밖으로 향해 있다는 걸 알았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허서령이 그녀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류 가방으로 가슴을 가렸다. 심박 수가 미친 듯이 치솟았고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거렸다.
얇은 흰색 셔츠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조금 전 셔츠가 물에 흠뻑 젖어 몸에 달라붙은 바람에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속옷의 색상과 모양까지 훤히 보였다.
지강산의 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가 한숨을 가볍게 내뱉더니 엘리베이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차갑게 말했다.
“올라가자.”
허서령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망설였다. 하지만 지금 처지를 생각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태풍이 상륙하기도 전인데 벌써 이 정도라면 잠시 이곳을 떠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여기서 버티다 병이라도 나면 그 고생은 온전히 그녀 몫이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소유하를 한 번 더 참는 수밖에. 날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계단에서 하룻밤 보내면 돼.’
지강산이 엘리베이터를 누르자 문이 천천히 열렸다.
허서령이 서류 가방을 품에 안은 채 서둘러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