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강태혁과의 연애 5주년 기념일.
강태혁이 내게 선물한 건 2만 원도 채 안 되는 싸구려 팔찌였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강태혁은 첫사랑인 심유나에게 무려 20억 원짜리 요트를 선물했다.
나는 이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강태혁은 오히려 내가 괜히 생떼를 쓴다며 몰아세웠다.
“유나한테 요트 선물한 건 회사 주가 때문이야. 아직 걔한테 미련이 남아서 그런 게 아니라고.”
“너처럼 가난한 여자랑 혼인신고까지 해 주겠다는데, 그것도 부족해? 사실 이게 너한테 주는 마지막 시험이었어. 임새별, 넌 탈락이야.”
나는 그 자리에서 헤어지자고 했다.
그러자 강태혁은 곧바로 심유나에게 청혼했다.
그리고 5년 후.
우리는 최고급 호텔에서 열린 비즈니스 서밋 미팅에서 다시 만났다.
강태혁의 회사는 업계 정상에 오르기 직전이었고, 그의 곁에는 심유나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가 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온몸이 엉망이 된 채 분수대 안에 서 있었다.
“임새별.”
강태혁이 비웃으며 말했다.
“그때 그렇게 잘난 척하면서 날 차고 떠나더니, 내가 없으면 거지보다도 못한 꼴이 될 줄은 몰랐지?”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와서 우연히 마주친 척하면서 불쌍한 꼴을 보여 봤자 소용없어. 내가 마음이 약해져서 널 다시 받아 줄 일은 없으니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들이 애지중지하던 블루 다이아몬드를 실수로 분수대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아이 아빠가 생일 선물로 준 것이었다.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아서, 무슨 일이 있어도 얼른 찾아야 했다.
제1화
“뻔뻔한 거지 같으니라고.”
5년 만에 다시 만난 강태혁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이렇게 모욕했다.
저 멍청이는 지금 자신이 비웃는 여자가 바로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어떻게든 눈에 들려고 애를 쓰는 세계 최고 부자의 아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강태혁은 심유나와 팔짱을 낀 채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그를 알아본 재계 인사들은 반색하며 앞다퉈 몰려들었다.
“강 대표님! 이번 비즈니스 서밋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불과 5년 만에 회사를 상장시키시다니, 젊은 나이에 정말 대단하십니다.”
“강 대표님도 혹시 그분의 투자를 받으려고 오신 겁니까?”
강태혁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사람들 사이에서 알겠다는 듯한 속삭임이 오갔다.
오늘 이곳에 모인 참석자 중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세계 최고 부자의 눈에 들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심유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분이 강 대표님의 사모님이시군요? 두 분 정말 천생연분이십니다.”
심유나는 강태혁에게 더욱 바짝 달라붙으면서 다정하게 웃었다.
“아직 혼인신고는 안 했어요. 회사가 업계 정상에 오르면, 그때 혼인신고도 하고 결혼식도 올릴 생각이에요. 청첩장을 보내 드릴 테니까 꼭 참석해 주세요.”
순간 강태혁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요즘 둘 다 회사 일로 워낙 바빠서요. 그래도 오랫동안 사랑해 온 사이인데, 혼인신고나 결혼식은 그저 형식적인 절차일 뿐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의 축하 인사가 다시 쏟아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조금 놀랐다.
‘아직도 혼인신고도 안 하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다고?’
강태혁은 나와 헤어진 지 불과 며칠 만에 심유나에게 청혼했다.
그토록 서둘러서 세린그룹을 거느린 심씨 집안의 지원을 받으려 했기에 진작 정략결혼을 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미루고 있는 걸까?’
재계에서 정략결혼은 집안의 입지를 다지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때 호텔 보안요원 한 명이 굳은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손님, 여기는 최고급 리조트입니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보안요원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눈빛에는 경멸의 기색이 가득했다.
조금 전까지 아들과 해변에서 놀았던 탓에 옷에는 모래가 잔뜩 묻어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분수대 안에 들어가느라 온몸이 흠뻑 젖어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손등에 찍은 투숙객이자 행사 참석자라는 걸 확인해 주는 도장마저 희미해져 있었다.
이런 몰골이니 오해할 만도 했다.
나는 서둘러 설명했다.
“죄송해요. 아들이 아끼는 보물이 분수대에 빠져서요. 찾는 대로 바로 객실로 돌아갈게요. 혹시 손해가 났다면 객실로 청구해 주세요. 객실 번호는...”
하지만 보안요원이 짜증스럽게 내 말을 끊었다.
“딱 봐도 몰래 기어들어 온 가난뱅이 주제에 무슨 투숙객 행세야? 당장 꺼져!”
날카로운 고함 소리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저런 사람이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야?”
“겁도 없네... 감히 최고급 호텔에서 열리는 비즈니스 서밋에 무단으로 들어오다니. 잡혀갈까 봐 무섭지도 않나?”
바로 그때 강태혁이 이쪽을 힐끗 돌아봤다.
순간 우리의 눈이 마주치자, 강태혁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임새별?”
보안요원이 놀란 얼굴로 강태혁을 바라봤다.
“강 대표님, 아시는 분입니까?”
강태혁은 곧바로 표정이 굳어지더니 경멸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전에 제 아버지가 후원했던 가난한 학생입니다. 별로 친하지도 않고요.”
말을 마친 강태혁은 나를 더 보는 것조차 더럽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5년 전, 나를 자기 인생에서 내쫓을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강태혁의 말을 들은 보안요원은 더욱 기세가 등등해서 나를 밀치려고 손을 뻗었다.
“그럴 줄 알았지. 당신 같은 사람들 내가 한두 번 본 줄 알아? 남한테 후원 좀 받았다고 평생 남자한테 빌붙어 살 수 있을 줄 알아?”
나는 몸을 옆으로 틀면서 보안요원의 손을 피했다.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말했잖아요. 물건만 찾으면 바로 나갈 거예요. 손해가 생기면 배상하겠다고도 했고요.”
보안요원은 코웃음을 치며 더욱 비아냥거렸다.
“배상? 당신이?”
그러더니 분수대 옆의 장식을 가리켰다.
“이게 뭔 줄이나 알아? 세계적인 조각가가 직접 만든 작품이야. 무려 74억 원짜리라고! 당신 같은 가난뱅이가 74억 원이 얼마나 큰돈인지 알기나 해? 당신 몸을 통째로 팔아도 못 갚을 돈이야!”
보안요원은 또다시 나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저 사람에게는 74억 원이 정말 엄청난 돈일지도 몰랐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겁먹을 만한 큰 돈이었다.
하지만 내게 그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만하시죠.”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가 있던 강태혁이 갑자기 돌아섰다.
강태혁은 내 앞으로 다가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눈빛은 마치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을 대하듯 싸늘했다.
“뭘 찾고 있는데? 얼마면 돼? 내가 줄게.”
강태혁은 역겹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이런 식으로 내 관심 끌 생각 하지 마. 수법도 참 유치하네. 난 너 같은 여자한테 전혀 관심 없어.”
심유나는 곧바로 강태혁의 팔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얼굴에는 여전히 달콤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에 서린 우월감과 악의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우리 이제 곧 결혼해. 차이고 나니까 억울하고 미련이 남는 건 알겠는데, 가난한 학생이랑 재벌가 사람은 사는 세상부터 달라.”
“너랑 태혁 씨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심유나는 웃는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여기서 광대처럼 난리 치지 말고 조용히 나가. 그래야 그나마 자존심이라도 지키지 않겠어?”
나는 가볍게 웃으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두 사람, 결혼해서 얼른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아.”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두 사람을 상대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쪼그리고 앉아서 분수대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블루 다이아몬드는 아이 아빠가 아들에게 처음으로 준 생일 선물이었다.
아들에게는 세상 전부나 다름없는 소중한 물건이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여기서 꺼질 건데?”
강태혁이 버럭 소리쳤다.
“아니면 더 많은 걸 바라는 거야?”
강태혁은 짜증스럽게 핸드폰을 꺼냈다.
“좋아. 태강그룹에 자리 하나 마련해 줄게. 대신 A국에 있는 해외 지사야. 다음 주부터 출근해. 그리고 앞으로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태강그룹 안주인이 될 사람은 오직 유나뿐이야. 내가 너랑 사귄 그 2년도 그저 불쌍해서 만나 준 것뿐이야.”
“그 정도 일자리면 새 출발을 하기엔 충분하겠지? 이제 너랑 수준 맞는 평범한 남자 만나서 살아. 나한테 더는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런데 갑자기 강태혁의 손가락이 멈췄다.
핸드폰 화면에 뜬 정보를 확인한 순간, 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뭐야? 예전에 태강그룹에 등록돼 있던 네 신상 정보는 다 어디 갔어?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신원 정보까지 삭제된 거야?”
제2화
나는 강태혁을 무심하게 보고는 다시 분수대 안을 더듬었다.
지금 내 신분은 특별한 사정으로 철저히 비밀이 된 상태였다. 그러니 강태혁이 아무리 뒤져 봐도 내 정보를 찾아낼 리 만무했다.
하지만 굳이 설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
“네 동정 따위 필요 없어.”
여전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강태혁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신원 정보가 조회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 집안도 변변찮고 인맥도 없으면 이 세상에서 누구한테든 짓밟힐 수 있다는 뜻이야!”
그때 심유나가 앞으로 다가왔다.
겉으로는 안타까운 척했지만, 눈빛에 담긴 경멸과 조롱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네가 왜 이러는지는 알겠어. 한때는 태혁이하고 사귀던 사이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가난뱅이 신세가 됐으니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하지만 넌 내세울 집안도 배경도 없잖아. 그게 현실이야. 그러니까 괜히 여기서 자존심 세우지 말고 태혁이가 호의로 마련해 주겠다는 일자리나 받아.”
주변에 모여 있던 재계 인사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비웃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고, 나를 깔보는 시선도 느껴졌다.
“빈민가 출신 여자가 재벌가 사람한테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네?”
“저 꼴 좀 봐. 저렇게 살다간 몇 년 뒤엔 길거리의 떠돌이 개처럼 남이 먹다 버린 음식이나 주워 먹겠어.”
“천한 것들은 어딜 가나 천한 법이지. 우리 밑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게 딱 어울려.”
바로 그 순간, 손끝에 매끄럽고 차가운 돌 같은 것이 닿았다.
아들의 블루 다이아몬드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이아몬드를 물속에서 꺼내 표면을 닦았다.
“찾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어서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거칠게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바로 강태혁이었다.
손목을 집게로 조이는 듯한 무지막지한 힘에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야 했다.
“임새별.”
강태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내 옆에서 내조하면서 살기 싫다고 날 찼지? 이제 세상 어디를 뒤져 봐도 나만 한 남자는 못 찾을걸?”
“이게 바로 날 거절한 대가야!”
강태혁의 손가락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손목에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강태혁이 손목을 세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손에 쥔 블루 다이아몬드를 놓칠까 봐 더 걱정이 됐다.
“이거 놔!”
“놔 달라고?”
강태혁이 비웃었다.
“돈도 빽도 없는 사람들이 권력자한테 밉보였다가,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 개처럼 무릎 꿇고 빌어 봐. 그럼 국내 지사에 청소부 자리 하나쯤은 알아봐 줄 수도 있으니까.”
나는 강태혁을 바라봤다.
오만함과 경멸로 가득한 얼굴에는 한때 내게 보여 줬던 다정함이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까도 말했잖아. 네 동정 따위 필요 없다고.”
“대체 왜!”
강태혁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듯했다.
“네 신원 정보가 삭제된 건 분명 무슨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겠지! 그런 널 나 말고 누가 받아 주겠어? 누가 감히 받아 주겠냐고!”
강태혁의 기세에 주변 사람들까지 겁을 먹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우스꽝스러운 광경일 뿐이었다.
“강태혁.”
나는 고개를 들어 강태혁의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실망시켜서 어쩌나? 내가 네 동정 따위 필요 없다고 한 건, 오늘 이 자리에 안도윤 대표 아내 자격으로 왔기 때문이야.”
순간 강태혁이 내 손목을 놓았다.
강태혁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곧이어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서, 이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너 같은 여자가 어떻게 안 대표님 부인이 됐다는 거야?”
제3화
그 말을 듣자 호텔 로비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여기저기서 의심과 조롱 섞인 말들이 쏟아졌다.
“빈민가 출신 여자가 무슨 수로 재벌가에 시집을 가겠어?”
“역시 가난한 것들은 인성부터 글러 먹었다니까. 거짓말은 밥 먹듯이 하고, 허영심만 가득하지.”
“딱 봐도 강 대표님을 화나게 하려고 저러는 거잖아.”
강태혁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 거짓말까지 하면 내가 화라도 낼 줄 알았어?”
“내가 네 집안 사정도 모를 것 같아? 어느 재벌가에서 너 같은 여자를 며느리로 받아 주겠어? 정략결혼으로 세력을 키울 필요조차 없는 세계 최고 부자라면 또 모를까!”
강태혁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내 눈에서 거짓말의 흔적이라도 찾아내려는 듯했다.
“아니면 여기 직원 하나 꼬셔서 행사장에 들어온 거야? 그래서 감히 대표 사모님이라는 거짓말까지 하는 거고?”
나는 대답하지 않고 손안에 든 블루 다이아몬드만 꼭 쥐었다.
위층에서는 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심유나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임새별이 그렇게 대표 사모님이 되고 싶다는데, 차라리 여기 남아서 쓸모 있는 일이라도 하게 해 주면 어때?”
심유나는 로비 안을 한 번 둘러봤다.
말투는 상냥했지만, 말끝마다 악의가 묻어났다.
“오늘 여기 계신 분들은 전부 굴지의 기업 대표님들이잖아. 차도 따라 드리고 물도 가져다드릴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어?”
그러더니 나를 향해 웃었다.
“너한테는 정말 좋은 기회야. 여기 계신 분들 중 한 분이라도 꼬시는 데 성공하면, 진짜 재벌가의 사모님이 될 수도 있잖아?”
“남한테 구걸하면서 동정받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지 않겠어?”
순간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상장사 대표의 전 여친에게 사람들의 시중을 들게 하며 구경거리로 삼겠다는 제안이 꽤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좋은 생각이네요! 거기 누구 없어요? 저 여자한테 메이드 복장 좀 입혀 주세요. 그리고 나한테 차랑 물 좀 가져오라고 해요!”
“저런 여자가 우리 시중을 들 수 있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유나 씨는 정말 마음씨도 좋으시네요. 저런 여자한테 이런 기회까지 주시다니. 저 같으면 진작에 쫓아냈을 겁니다!”
어이가 없고 화까지 치밀어 헛웃음이 나왔다.
“귀라도 먹었어? 싫다고 했잖아!”
내가 거절하자, 심유나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정말 분수를 모르네. 여기서 서빙이라도 하게 해 주겠다는데, 그게 얼마나 큰 기회인 줄 알아? 그런데 감히 거절을 해?”
강태혁의 표정도 한층 더 험악해졌다.
“대체 원하는 게 뭐야? 돈? 지위? 아니면 아직도 내 사랑을 원하는 거야?”
강태혁이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꿈 깨! 내 아내가 될 사람은 유나처럼 명문가에서 자란 여자뿐이야. 제발 현실 좀 똑바로 봐!”
그때, 제복을 입은 호텔 보안요원 여러 명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까부터 나를 모욕하던 보안요원이 곧바로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팀장님! 저 가난뱅이가 여기서 난동을 부리고 호텔 분수대까지 더럽혀 놓고는 나가질 않습니다.”
보안팀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오늘 비즈니스 파티에는 국내 최고 부자께서 사모님과 후계자분을 데리고 참석하실 예정이야. 가족분들이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자리라고.”
“그러니 절대로 무슨 일이 생겨선 안 돼!”
보안팀장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저런 사람이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사 품격이 떨어져. 당장 끌어내!”
보안요원 두 명이 앞으로 나서더니 나를 강제로 끌고 나가려고 했다.
바로 그때, 강태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잠깐!”
강태혁의 시선이 내 손에 들고 있는 블루 다이아몬드에 못 박혔다.
강태혁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다 이윽고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도 모르겠어? 난 너 같은 여자가 주는 싸구려 선물 따윈 필요 없다고.”
제4화
강태혁의 표정을 보자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5년 전, 비가 내리던 어느 밤이었다.
당시 회사를 물려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강태혁은, 경영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사진의 의심과 질책을 받고 있었다.
강태혁은 지친 몸을 이끌고 홀로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내가 찾아갔을 때, 강태혁은 손에 든 작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반지는 내가 먹고 싶은 것도 참고 돈을 아껴 가며 강태혁에게 사 준 첫 선물이었다.
“무슨 일 있어?”
내가 조용히 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에는 다정함과 씁쓸함이 뒤섞여 있었다.
“네가 이렇게 비싼 선물을 해 줄 만큼 내가 괜찮은 사람인가 싶어서. 새별아, 어쩌면 난 회사를 제대로 이끌 능력이 없는 걸지도 몰라.”
나는 강태혁의 뒤로 가서 어깨를 부드럽게 주물러 주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넌 지금도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잖아.”
“새별아.”
강태혁이 고개를 돌리고 나를 바라봤다. 눈빛에는 불안하고 나약한 기색이 역력했다.
“언젠가 내가 지금보다 더 성공하면 더 큰 시련이 찾아올 수도 있겠지. 그때도 지금처럼 내 곁에서 함께해 줄 거야?”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하지. 네가 어디까지 올라가든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때 강태혁은 내 손을 꼭 잡았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다이아몬드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 강태혁은 그때의 반지보다 몇 배나 비싼 블루 다이아몬드를 보고도 싸구려 선물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임새별?”
내가 생각에 잠겨 있자 심유나가 짜증을 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손에 든 블루 다이아몬드나 당장 내놔!”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 손에 들린 블루 다이아몬드에 쏠려 있었다.
“내놓으라고? 내가 왜?”
보안팀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블루 다이아몬드가 얼마나 비싼 물건인 줄 알아? 여기 계신 부자분들한테야 별것 아닐지 몰라도, 당신 같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물건은 절대 아니야. 어디서 훔쳤어?”
“훔친 거 아니에요.”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 아들 돌 선물이라고요.”
“선물?”
심유나가 코웃음을 쳤다.
“거짓말을 하려면 좀 그럴듯하게 해 봐. 네 주제에 잘해 봤자 너랑 똑같은 가난뱅이랑 결혼해서 가난한 애들이나 몇 명 낳았겠지.”
“대체 누가 네 아들한테 이렇게 희귀하고 값비싼 블루 다이아몬드를 선물하겠어?”
아까 그 보안요원이 냉큼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분명히 훔친 겁니다. 저런 가난뱅이가 이런 블루 다이아몬드를 무슨 수로 손에 넣었겠습니까?”
보안팀장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귀중품 절도는 범죄입니다. 법에 따라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겁니다.”
“훔친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그제야 강태혁이 입을 열었다.
“그럼 네 물건이라는 걸 증명해 봐. 증명하지 못하면 비즈니스 서밋 부회장 자격으로 널 경찰에 넘기겠어.”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던 그때였다.
띵-
갑자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이가 울면서 밖으로 뛰어나왔다.
“엄마! 엄마! 내 다이아몬드는? 아빠가 엄마가 찾아 줄 거라고 했는데!”
내 세 살배기 아들, 안시우였다.
아들을 보는 순간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시우야!”
나는 무릎을 꿇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엄마가 찾았어! 여기 있어!”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이는 이제 겨우 세 살이었다.
하지만 시우가 입고 있는 옷은 상류층이라면 누구나 아는 천재 디자이너 여름이 직접 만든 맞춤 정장이었다.
올해 초,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재력가가 경매에서 무려 20억 원에 낙찰받은 바로 그 정장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만큼 유명한 옷이었다.
“저... 저 아이는...”
보안팀장이 말을 더듬었다.
그 순간 심유나가 갑자기 달려들더니 내 품에서 시우를 강제로 빼앗아 갔다.
“딱 봐도 명문 재벌가 후계자인데, 어떻게 임새별의 아들이겠어?”
안시우는 심유나의 품에서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엄마! 엄마! 우리 엄마한테 갈래!”
“이 아이는 납치당한 게 분명해요!”
심유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임새별은 도둑일 뿐만 아니라 재벌가 후계자만 골라 납치해서 팔아넘기는 인신매매범이에요!”
로비가 발칵 뒤집혔다.
“재벌가 후계자를 납치했다고?”
“세상에! 역시 빈민가 출신은 버릇을 못 고친다니까. 재벌가 후계자를 납치해서 팔자 한번 고쳐 보려던 거야?”
“그러니까 블루 다이아몬드도 갖고 있었던 거구나! 아이를 납치하면서 보석까지 훔친 게 분명해!”
보안팀장이 즉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저 여자 제압해! 중범죄자야!”
보안요원 여러 명이 달려들더니 내 두 팔을 등 뒤로 꺾으면서 붙잡았다.
나는 몸부림치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건장한 남자들은 힘도 셌고 숫자도 많았다.
“놔! 당장 놓으라고!”
나는 분노에 차 소리쳤다.
“시우는 내 아들이야!”
“네 아들이라고?”
심유나가 울고 있는 시우를 안은 채 비웃었다.
“어느 재벌가에서 너 같은 가난뱅이 핏줄을 받아 주겠어? 너 같은 여자가 재벌가 후계자를 낳는 걸 허락할 집안이 어디 있냐고. 임새별, 거짓말도 갈수록 가관이네.”
시우는 심유나의 품에서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우리 엄마한테 갈 거야! 나쁜 아줌마! 나쁜 아줌마!”
아들이 저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 내 가슴은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있는 힘껏 몸부림쳤지만, 보안요원들은 오히려 나를 더 세게 붙잡았다.
“임새별.”
강태혁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강태혁은 나를 내려다보며 몹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욕심 많은 여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지경까지 타락할 줄은 몰랐어.”
“도둑질에 납치, 거짓말까지... 대체 네가 못 할 짓이 뭐가 있겠어? 그때 널 선택하지 않길 정말 잘했어. 넌 태강그룹 안주인이 될 자격이 없어.”
강태혁은 보안팀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여자 끌고 가서 경찰에 넘기세요. 그리고 행사에 참석한 주요 인사들한테 연락해서 아이를 잃어버린 집안이 있는지 확인하세요.”
“안 돼!”
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 소리쳤다.
“시우는 내 아들이야! 내 아들을 데려가면 안 된다고!”
바로 그때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숨 막힐 듯한 위압감을 풍기는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188센티의 키에 몸에 꼭 맞게 재단된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는 손짓 하나, 걸음걸이 하나에도 남다른 위엄이 배어 있었다.
강태혁을 비롯해 현장에 있던 모든 기업 대표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면서 예의를 갖췄다.
조금 전까지 시끄럽던 로비에는 낮은 속삭임만 흘렀다.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게 들렸다.
“그분이 오셨어. 다들 잘 보여야 해. 이따가 투자도 부탁드려야 하잖아...”
남자의 새까만 눈동자가 로비를 천천히 훑었다.
그러다 마침내 내게 시선이 머물렀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내 눈시울이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