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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의 시차
내 약혼자 유승진에게는 이상하리만치 철저한 원칙이 하나 있었다. 밤 9시가 넘으면,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는다. 우리 사이가 가장 뜨거웠던 때조차 예외는 없었다. 시계가 9시를 가리키는 순간, 유승진은 언제나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한번 귀가가 늦어진 날이 있었다. 누군가 계속 뒤따라오는 기척에 겁이 난 나는 다급히 유승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걱정이 아니라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나이가 몇인데 그래? 다른 사람 생활 패턴도 좀 존중해 줘. 끊는다.] 결국 그날 나는 혼자 지구대에서 진술을 마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유승진은 나에게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래도 나는 믿었다. 그저 원칙이 철저한 사람일 뿐이라고. 오늘, 우연히 그의 노트북을 쓰게 되기 전까지는. 핸드폰과 연동된 통화 내역 속에서 이상한 기록 하나를 발견했다. 밤 9시부터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꼬박 12시간. 하루도 빠짐없이. 그것도 무려 5년 동안 이어진 통화였다. 상대는 낯선 사람도 아니었다. 유승진 어머니의 제자이자, 그의 연구조교. 화면을 바라보는 동안 온몸을 버티고 있던 힘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다리가 저릴 때까지 한참을 앉아 생각에 잠겼던 나는 말없이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고 유승진과 함께 구청에 가서 하기로 했던 혼인신고 일정도 취소했다.
챕터 (1)
1화
내 약혼자 유승진에게는 이상하리만치 철저한 원칙이 하나 있었다.
밤 9시가 넘으면,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는다.
우리 사이가 가장 뜨거웠던 때조차 예외는 없었다.
시계가 9시를 가리키는 순간, 유승진은 언제나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한번 귀가가 늦어진 날이 있었다.
누군가 계속 뒤따라오는 기척에 겁이 난 나는 다급히 유승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걱정이 아니라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나이가 몇인데 그래? 다른 사람 생활 패턴도 좀 존중해 줘. 끊는다.]
결국 그날 나는 혼자 지구대에서 진술을 마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유승진은 나에게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래도 나는 믿었다.
그저 원칙이 철저한 사람일 뿐이라고.
오늘, 우연히 그의 노트북을 쓰게 되기 전까지는.
핸드폰과 연동된 통화 내역 속에서 이상한 기록 하나를 발견했다.
밤 9시부터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꼬박 12시간.
하루도 빠짐없이.
그것도 무려 5년 동안 이어진 통화였다.
상대는 낯선 사람도 아니었다.
유승진 어머니의 제자이자, 그의 연구조교.
화면을 바라보는 동안 온몸을 버티고 있던 힘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다리가 저릴 때까지 한참을 앉아 생각에 잠겼던 나는 말없이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고 유승진과 함께 구청에 가서 하기로 했던 혼인신고 일정도 취소했다.
제1화
화면에 떠 있던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 하기로 했던 일정을 지웠을 때쯤, 유승진이 욕실에서 나왔다.
내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유승진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좁혔다.
“할 말 있어? 곧 9시야. 나 쉬어야 해.”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없어.”
유승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자.”
내 감정이 달라졌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채 미련 없이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넋을 놓고 잠시 앉아 있었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꺼졌던 노트북 화면이 환해지며, 핸드폰과 연동된 한설아의 전화가 떴다.
유승진은 달랐다.
9시가 넘으면 전화도, 대화도, 메시지도 거부하던 유승진이 한 번의 울림도 다 지나기 전에 전화받았다.
한설아를 조금이라도 기다리게 할까 봐 조급한 사람처럼.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참 다정하기도 하지. 곧 아내가 될 나만 예외가 아니었을 뿐.’
안방으로 돌아오니, 유승진은 이미 눈을 감은 채 잠든 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야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액정이 아래로 향하도록 항상 엎어 두는 핸드폰.
오른쪽 귀에 꽂힌, 눈에 잘 띄지 않는 검은 이어폰.
나는 불을 끈 뒤 어둠 속에서 지난주 국장님이 보내온 해외 파견 제안에 답했다.
결혼하자마자 유승진과 떨어져 살고 싶지 않아 처음에는 거절했던 제안이었다.
이제는 모든 게 끝났다.
국장님에게서 곧 답장이 왔다.
[결심한 거야? 주프랑스 대사관은 최소 5년 근무야. 확실하다면 공무 비자부터 진행해. 이틀 뒤 출국이야.]
[네, 알겠습니다.]
나는 바로 답했다.
옆에서는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한설아도 지금쯤 마음 편히 잠들었겠지.’
침대에 누운 뒤에야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멍해졌다가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
...
다음 날 눈을 뜨니 유승진이 드레스룸에 서 있었다.
몸을 일으킨 나는 유승진의 핸드폰에 손을 대 보았다.
배터리가 엄청나게 뜨거웠다.
공무 비자 신청에 필요한 서류를 챙긴 뒤 유승진을 한 번 바라보고 집을 나섰다.
서로 어깨를 스쳐 지나가려던 때, 유승진이 당황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오늘은 넥타이 안 매 줘?”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제 안 매 줄 거야. 직접 매는 법을 배워.”
잠깐 말을 고른 뒤 덧붙였다.
“아니면 조교한테 부탁하든가.”
유승진은 손에 든 물건을 내려놓고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한설아 말이야?”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늘 서늘하고 엄격하던 유승진의 인상이 부드러워졌다.
눈가에도 엷은 웃음이 스쳤다.
“설아가 넥타이는 잘 매지. 꼼꼼한 애니까. 그런데 그게 네가 내 넥타이를 매 주는 것과 무슨 상관이야?”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아예 설명을 포기했다.
“아무 상관 없어. 그냥 하고 싶지 않아.”
유승진은 못마땅한 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마음대로 해. 참, 오늘 점심은 가져오지 마. 설아가 방금 내 것까지 챙겨 오겠다고 연락했어.”
문손잡이를 쥔 손이 잠시 멈췄다.
“그래.”
유승진은 일 때문에 위염이 심했다. 예전의 나는 아무리 바빠도 직접 밥을 지어 유승진의 도시락을 챙겼다.
‘잘됐네. 이제 그 수고에서 벗어나니 오히려 홀가분해.’
더는 유승진의 기분까지 살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대화를 끝내고 문을 닫았다.
프랑스 대사관 영사부에 들러 5년짜리 장기 파견 비자를 접수했다.
뒤이어 외교부 청사로 가서 파견 명령서도 받아 왔다.
서류를 가방 안에 넣고, 청사 앞에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벚꽃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가벼움과 해방감이 밀려왔다.
문득 떠오른 일이 있어 예식 준비 앱을 열고 파트너 정보에 저장돼 있던 유승진의 주민등록번호를 완전히 지웠다. 앞으로는 쓸 일이 없을 테니까.
문득 생각난 게 있어 미리 작성해 둔 혼인신고서 파일을 열었다. 그 안에 적어 둔 유승진의 정보를 망설임 없이 전부 지웠다. 이제는 다시 쓸 일이 없을 테니까.
제2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국장님의 전화를 받았다. 경휘대학교 인문대학에 들러 자료 한 부를 대신 수령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전화를 끊자,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선을 긋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승진이 바로 경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였기 때문이다.
인문대 건물에 도착했을 때는 학생들이 수업을 들으러 몰리는 시간대였다.
듣고 싶지 않아도 귀에 들어오는 말들이 있었다.
“유승진 교수님 수업, 나 진짜 겨우 신청했어! 수강 신청 경쟁률이 장난 아니잖아.”
“맞아. 여학생들은 유승진 교수님 보러 가고, 남학생 절반은 한설아 조교 선생님 보러 가잖아. 둘이 서 있으면 정말 잘 어울리긴 해.”
내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쓰디쓴 감정이 가슴안으로 번졌다.
유승진과 5년을 만나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유승진의 인간관계 안에 떳떳하게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한창 사랑에 빠져 있던 때에는 나를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해 달라고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카톡 프로필 배경을 내 사진으로 바꿔 달라고도 했다.
하지만 유승진은 매사 빈틈없는 국문과 교수답게 철없는 아이를 타이르듯 미간을 좁히곤 했다.
“임지유, 좀 어른스럽게 굴어.”
“18살도 아니잖아. 그런 겉치레는 유치해. 내 위치에도 맞지 않고.”
그날 나는 유승진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뒤로는 다시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곁을 지나던 여학생들은 여전히 유승진과 한설아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떠들어 댔다.
“솔직히 학교 인물 소개에 유승진 교수님이 약혼 중이라고 나오잖아. 난 상대가 한설아 조교 선생님인 줄 알았어. 약혼자를 봤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분명 그럴걸. 그렇게 무뚝뚝한 분이 한설아 조교 선생님을 향해서만 웃잖아.”
두 학생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내 걸음은 더뎌지다 못해 복도 한쪽에서 완전히 멈췄다.
그동안 참아 온 서러움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나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도 내게는 떠날 길이 있어. 이틀 뒤면 모든 게 끝나.’
국장님이 부탁한 서류를 받아 나오다가 두 번째 교수 연구실 앞을 지날 때 익숙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이거 드셔보세요. 정말 맛있다니까요!”
살짝 열린 문틈 너머로 함께 아침을 먹는 한설아와 유승진이 보였다.
한설아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두유 팩에 꽂은 빨대를 유승진의 입가로 가져갔다.
유승진은 두유를 좋아하지 않았다.
예전에 한 번 아침상에 올렸다가 유승진은 대놓고 기분을 굳힌 채 나가 버렸고, 나는 집에 혼자 남아 울었다.
그런데 지금은 유승진이 미간을 조금 찌푸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설아가 재촉하자 못 이기는 척 한숨을 내쉬면서도 태도에는 다정한 관용이 묻어났다.
유승진은 결국 두유를 마셨다.
한설아가 큰 눈을 반짝였다.
“어때요? 맛있죠?”
유승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 만하네.”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없는 곳에서 유승진은 누군가에게 이토록 부드럽게 맞춰 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다만 나는 5년 동안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연구실 안에서 유승진은 휴지로 한설아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자연스럽게 닦아주며 나직이 물었다.
“어젯밤에는 잘 잤어? 또 잠 못 든 건 아니고?”
“푹 잤어요.”
한설아가 웃었다.
“아시잖아요. 교수님이 통화를 끊지 않고 있어 주시면 저는 잘 잘 수 있어요.”
한설아는 뒤늦게 떠오른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밤 9시 이후에는 전화를 안 받으신다고 들었어요. 제가 방해하는 건 아니죠?”
유승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너는 예외야.”
고작 한마디 말이 가시덩굴처럼 내 심장을 옭아매 숨조차 쉬기 힘들게 했다.
유승진의 입으로 직접 듣고 나니 한동안 숨이 막힐 듯 아팠던 내 마음은 차츰 아무 감각도 남지 않은 무감각으로 변했다.
가시는 뽑을 때 몹시 아프다. 그래도 뽑아내기만 하면 언젠가는 상처가 아문다.
나는 벽에 기대어 서 있던 나는 눈에 남은 감정을 모두 거두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와 여행 가방을 꺼내고 내 물건을 하나씩 담았다.
5년이나 살았던 집에서 가져갈 것은 가방 하나조차 다 채우지 못했다.
저녁이 되자 유승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려올 준비해. 오늘은 본가에서 저녁 먹는 날이야.]
“응.”
나는 짧게 대답했다.
길가에 세워진 마이바흐를 보자 습관처럼 다가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한설아가 조수석에 앉아 호두과자를 먹고 있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좌석 위로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본 나는 반사적으로 유승진을 살폈다.
유승진은 차 안에서 음식을 먹는 걸 싫어했다.
나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유승진은 담담했다. 이미 익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제야 알았다.
‘맞다. 한설아는 유승진에게 늘 예외였지.’
한설아는 다급히 입가를 닦고 좌석을 정리했다.
“제가 뒤로 갈게요. 저는...”
나는 차분히 웃었다.
“괜찮아. 그냥 앉아 있어. 그냥 자리 하나일 뿐인데.”
뒷좌석 문을 연 내게 유승진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신경 쓰지 않았다.
예전에 나도 비슷한 일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때마다 유승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나를 나무라며 끝났다.
“임지유, 자리 하나 가지고 유난 떨지 마.”
차창 밖으로 가늘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이전처럼 서럽거나 속상하지 않았다. 나조차 낯설 만큼 마음이 잔잔했다.
‘그래.’
‘자리 하나야.’
‘사람 하나야.’
‘내게는 둘 다 다를 게 없어. 버리면 그만이야.’
제3화
시댁에 도착하자 시어머니인 서미경 교수가 집 앞에서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한설아는 서미경 교수에게 달려가 팔짱을 끼며 살갑게 말했다.
“교수님! 바람도 찬데 왜 직접 나오셨어요? 얼른 들어가요.”
서미경 교수는 자애롭게 웃었다.
“설아 너를 기다렸지. 내가 승진이 밑에서 일하게 해 괜히 널 고생시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승진이 성격이 워낙 별나야지.”
한설아는 곁에 서서 부드럽게 웃는 유승진을 흘깃 보더니 귓불을 붉혔다.
“유승진 교수님도 저한테 잘해주세요. 힘든 것도 전혀 없고요.”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몇 걸음을 앞서가던 서미경 교수는 뒤늦게 나를 떠올린 듯 돌아보았다. 나를 향한 눈에는 선명한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
“지유도 왔구나. 어서 들어와라. 감기 들겠다.”
그 말이 전부였다.
유승진이 내 곁으로 다가와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기분 안 좋아?”
“아니.”
나는 그저 후련해졌다.
유승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
“일이 마음대로 안 풀렸더라도 집에까지 티 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하루 종일 울상인 사람을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옆으로 늘어뜨린 내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손바닥이 아릴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아주 잠깐이나마 기대했다.
‘유승진이 내 감정을 알아챈 건 아닐까?’
나는 걸음을 멈췄다. 유승진을 바라보던 눈에서 애정이 걷히고 차분한 냉기만 남았다.
“내 기분이 나쁘든 내키는 대로 행동하든 내 마음이야. 보기 싫으면 보지 마.”
“나는 당신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도 아니고, 당신이 원할 때마다 당신에게 맞춰야 하는 사람도 아니야.”
유승진의 입매가 반듯하게 굳었다. 불쾌함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임지유, 너도 어른이야. 곧 결혼할 텐데 내 아내가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면 곤란해.”
나는 비웃듯 짧게 웃었다.
“그럼 당신 기준에 맞는 사람은 누군데?”
유승진은 진지하게 생각하는 척했지만, 이미 마음속에 답이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누가 됐든 내 아내는 너뿐이야.”
“다만 설아는 감정 조절을 잘하잖아. 그런 점은 좀 배워도 좋다는 말이지. 알았어?”
나는 유승진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끝내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본채 다이닝룸에 들어서자 서미경 교수는 한설아와 유승진을 양옆에 앉혔다.
나는 세 사람을 방해하지 않을 만한 자리로 알아서 물러났다.
자리에 앉은 뒤에야 알았다.
식탁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단 하나도 없었다.
서미경 교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환하게 웃었고, 한설아의 그릇에 쉴 새 없이 반찬을 놓아주었다.
“어쩌다 이렇게 말랐니.”
“연구도 좋지만 몸부터 챙겨야지. 전부 승진이가 말해 줘서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준비했단다.”
한설아가 수줍게 웃었다.
“감사해요, 교수님.”
서미경 교수는 말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렸다. 멋쩍은 표정으로 나를 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지유야,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따로 준비를 못 했구나. 오늘은 있는 대로 먹으렴.”
유승진은 배를 넣어 푹 익힌 돼지갈비찜을 내 그릇에 덜어주었다.
“다음부터는 먹고 싶은 걸 미리 말해. 집에 준비해 두라고 할게.”
“너는 딱히 좋아하는 음식도 없잖아.”
“설아는 닭강정이나 달콤한 돼지갈비찜처럼 애들이 좋아하는 음식만 좋아해서 금방 알 수 있는데.”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먹지 못하는 음식이 담긴 그릇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
5년.
우리는 5년이나 함께했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하나하나 말해 줘야만 유승진은 알았다.
반면 한설아의 취향을 막힘없이 읊어대는 유승진의 말은 나의 실패한 사랑을 비웃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국장님이 보내온 항공편 안내 메시지였다.
출발 시각은 내일 오전 8시였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드디어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수저를 들지 않았고, 유승진은 그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구경꾼처럼 세 사람이 이루는 화목한 풍경만 조용히 바라보았다.
내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끼고 싶지도 않았다.
제4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한설아가 조수석에 앉았다.
유승진은 먼저 한설아의 집으로 향했다.
뒷좌석에 앉은 나는 프랑스의 집주인과 임대 조건을 조율하고 있었다.
“앞으로 와서 앉아.”
유승진이 불쑥 말했지만 나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됐어.”
유승진은 입을 다문 채 잠시 기다렸다.
“마음대로 해.”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햇살이 환하게 드는 집이 무척 마음에 들어 곧바로 계약금을 보냈다.
집에 도착한 뒤
유승진은 서류 가방에서 두꺼운 화보집을 꺼내 내 곁으로 왔다.
“한번 볼래?”
의아한 채 받아 보니 웨딩드레스 화보였다.
“되도록 빨리 하나 골라. 결혼식까지 한 달밖에 안 남았으니 제작실에도 여유를 줘야지.”
유승진은 눈꽃을 닮은 입체 장식이 가득 달린 드레스를 가리켰다.
“나는 이게 괜찮아 보여.”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눈꽃, 설아.’
‘정말 어디에서나 한설아를 떠올리는구나.’
예전의 나라면 분명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찮네. 이걸로 하자.”
‘어차피 나는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
‘한 달 뒤의 결혼식이 나와 무슨 상관일까?’
유승진은 순순히 따르는 내 태도가 만족스러운 듯 상이라도 주듯 이마에 입을 맞췄다.
“착하네.”
“이렇게 하면 돼. 낮처럼 인상 쓰고 있는 건 싫어. 앞으로는 그러지 마. 알겠지?”
할 말을 마친 유승진은 혼자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소독용 물티슈로 유승진이 입을 맞춘 자리를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몇 번이고 닦고 나서야 손을 멈췄다.
시계가 9시를 가리켰다.
유승진은 평소처럼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은 뒤집어 놓았고 오른쪽 귀에는 무선 이어폰을 꽂았다.
텅 빈 화장대와 욕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 협탁 옆에 놓인 여행 가방도 보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지.’
한설아가 아니라면 유승진은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깊은 밤이 되었을 무렵, 날카로운 비명에 잠이 깼다.
옆에 누워 있던 유승진도 벌떡 일어났다. 크게 당황한 나머지 이어폰을 향해 소리치는 목소리까지 떨렸다.
“설아야? 무슨 일이야?”
고요한 밤, 한설아가 통화 너머에서 계속 우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늘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유승진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침대에서 뛰어내려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9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던 생활 패턴도...
한설아 앞에서는 언제든 내던질 수 있었다.
나는 뒤따라갈 생각이 없었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할 일 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경휘대 교내 익명 커뮤니티가 발칵 뒤집힌 걸 보았다.
[괴한이 교직원 사택에 침입했대. 인문대 한설아 조교 선생님이 당했다는 것 같은데!]
[안 다쳤어! 현장 상황 알려 줄게. 괴한이 한설아 조교 선생님 창문에 붙어서 문을 따려던 때 유승진 교수님이 나타났어!]
[유승진 교수님 표정이 정말 무서웠어. 이성을 잃은 맹수처럼 괴한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팼어!]
[경찰도 왔어.]
나는 말없이 게시글을 읽었다. 문장마다 첨부된 사진이 어둡고 서늘한 안방 안에서 눈을 찔렀다.
얼마 뒤에는 영상까지 올라왔다.
영상을 눌러 보니, 글에 적힌 그대로였다. 규칙을 입에 달고 살던 유승진은 화면 속에서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복면을 쓴 남자에게 주먹을 몇 번이고 내리꽂았다.
경찰이 도착하고 나서야 유승진은 손을 멈췄다.
뒤돌아선 유승진은 한설아를 품에 단단히 끌어안았다.
피투성이가 된 현장을 보지 못하도록 한설아의 머리를 제 가슴에 꽉 끌어안았다.
“괜찮아. 내가 여기 있어.”
영상은 곧 실시간 인기 게시물 맨 위에 올랐다. 사람들은 아내를 저토록 사랑하는 남자가 가장 멋있다며 떠들었다.
나는 오래도록 화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오래오래 행복하길 바란다는 가장 인기 있는 댓글에 공감을 눌렀다.
곧이어 아무렇지 않게 화면을 닫았다.
그날 밤 유승진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예상했던 일이었다.
나는 꿈도 꾸지 않고 푹 자다가 오전 6시에 눈을 떴다.
미리 싸 둔 여행 가방과 신분증, 서류를 챙긴 뒤 탁자에 놓인 결혼 준비 화보를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현관 수납장 위에 집 키를 올려 두고,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공항에 도착해 파혼 소식을 SNS 계정 맨 위에 고정한 뒤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하늘로 떠오르자, 유승진과 나 사이의 인연도 그날로 완전히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