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용서하는 일은 끝났다

GoodNovel new 완결

유규한과 다시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해, 송지윤은 아이를 가졌다.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는 더 이상 유규한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를 낮췄다. 늦은 귀가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회식 후 술에 취해 돌아오는 날에도 자신이 직접 맞이하지 않았고, 가사도우미에게 숙취에 좋은 콩나물국만 준비해 달라고 했다. 유규한이 바쁘다는 이유로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아도, 관사 관리실을 통해서 찾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참고 또 참던 송지윤은 임신 8개월째, 유규한의 코트 주머니에서 낯선 여자의 수분크림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제자리에 돌려놓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걸 모른 척하려던 어느 날. 송지윤은 관사 근처 미래여성병원에서 정기 검진을 받던 중,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과 마주했다. 병실에서 나온 간호사 두 명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 중령님, 돌아가신 전우의 아내를 정말 지극정성으로 챙기시더라. 아기를 낳자마자 병원에서 제일 좋은 특실까지 잡아줬대.” “진혜라 씨 말이야? 유 중령님 전우의 미망인이라잖아. 낮에는 병원에서 병실을 지키고, 밤에도 관사에 들어가지 않을 만큼 신경을 쓴다더라. 정말 대단한 의리야.” “그런데 유 중령님 아내분도 곧 출산 아니야?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괜찮을까?”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였지만, 그 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송지윤의 귀에 박혔다. 그리고 병실 안.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 그 사람은 바로 그녀의 남편 유규한이었다. 송지윤은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시울을 붉혔다.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는 더 이상 용서하지 않기로 했다. 다시 시작한 결혼도, 끝까지 지키려 했던 마음도. 이제는 모두 끝낼 시간이었다. 송지윤은 이혼을 결심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절대로 유규한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챕터 (1)

1화

유규한과 다시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해, 송지윤은 아이를 가졌다.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는 더 이상 유규한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를 낮췄다. 늦은 귀가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회식 후 술에 취해 돌아오는 날에도 자신이 직접 맞이하지 않았고, 가사도우미에게 숙취에 좋은 콩나물국만 준비해 달라고 했다. 유규한이 바쁘다는 이유로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아도, 관사 관리실을 통해서 찾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참고 또 참던 송지윤은 임신 8개월째, 유규한의 코트 주머니에서 낯선 여자의 수분크림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제자리에 돌려놓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걸 모른 척하려던 어느 날. 송지윤은 관사 근처 미래여성병원에서 정기 검진을 받던 중,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과 마주했다. 병실에서 나온 간호사 두 명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 중령님, 돌아가신 전우의 아내를 정말 지극정성으로 챙기시더라. 아기를 낳자마자 병원에서 제일 좋은 특실까지 잡아줬대.” “진혜라 씨 말이야? 유 중령님 전우의 미망인이라잖아. 낮에는 병원에서 병실을 지키고, 밤에도 관사에 들어가지 않을 만큼 신경을 쓴다더라. 정말 대단한 의리야.” “그런데 유 중령님 아내분도 곧 출산 아니야?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괜찮을까?”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였지만, 그 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송지윤의 귀에 박혔다. 그리고 병실 안.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 그 사람은 바로 그녀의 남편 유규한이었다. 송지윤은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시울을 붉혔다.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는 더 이상 용서하지 않기로 했다. 다시 시작한 결혼도, 끝까지 지키려 했던 마음도. 이제는 모두 끝낼 시간이었다. 송지윤은 이혼을 결심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절대로 유규한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제1화 “유 중령, 축하해. 아주 건강한 아들이네!” “송지윤 씨가 딸을 낳으면 아들딸 다 둔 셈이겠어!” “송지윤 씨는 이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지?” 병실에는 유규한과 가까운 남자 동료 몇 명이 함께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유규한의 표정이 한층 진지해졌다. “당연히 모르지. 너희도 집사람 앞에서 절대 입 열지 마. 지금 임신 막바지라 마음이 흔들리면 안 돼.” “언제까지 숨길 생각인데? 계속 모른 척할 수는 없잖아.” 유규한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집사람이 출산하면 말할 거야. 아이가 생기면 떠나지 못할 테니까.” 침대에 누운 진혜라가 여린 목소리로 물었다. “규한 씨가 난처해지는 건 아니지? 준영 씨가 세상을 떠난 뒤, 규한 씨 곁에서 대를 이을 아이를 낳은 것만으로도 난 충분해.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유규한은 진혜라를 끌어안았다. “혜라 씨를 돌보겠다고 약속했으니 반드시 지킬 거야. 지난 3년 동안 숨어 지내듯 내 곁에 있어야 했던 혜라 씨가 고생했지.” 송지윤은 문틈 사이로 늘 차갑고 기품 있던 유규한의 얼굴에 다정함이 가득 번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입가에는 자조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3년 전에도 송지윤은 유규한이 전사한 전우 이준영의 아내 진혜라와 뒤엉킨 장면을 목격한 뒤 이혼을 요구했다. 송지윤이 이혼하겠다고 하자, 진혜라는 죽겠다며 소동을 벌였다. 두 여자 사이에서 유규한은 진혜라를 택했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지 3년 후, 유규한은 모든 것을 버리고 멀리 떠난 송지윤을 찾아서 부남시로 향했다. 다시 만난 유규한은 송지윤 앞에 무릎을 꿇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사랑한 사람은 송지윤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때 이혼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진혜라가 정말 목숨을 끊을까 두려운 데다가 죽은 전우에게 죄를 짓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다. 송지윤을 안심시키겠다며 진혜라를 아예 다른 도시로 보냈다고도 했다. 알고 지낸 세월은 10년, 사랑한 시간은 5년이었다. 송지윤 역시 그 사랑을 놓지 못해서 결국 마음이 약해졌고, 재결합을 받아들였다. 다시 함께 살기 시작한 뒤 유규한은 집착에 가까울 만큼 송지윤에게 보상하려고 했다. 송지윤이 좋아하는 딸기우유 사탕은 구하기 힘들었지만, 먼 도시의 지인에게 부탁해서 보내오게 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송지윤을 위해서 자기 패딩의 충전재까지 빼내서 두툼한 겨울 외투를 새로 맞춰 줬다. 훈련에 나가서도 틈이 날 때마다 전화를 걸어 무사하다고 알려 왔다. 하지만 지난 3년 내내 유규한이 진혜라를 보낸 적조차 없었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유규한은 진혜라를 근처에 숨겨 둔 채 관계를 끊지 않았고, 둘 사이에는 아이까지 생겼다. 송지윤은 이제야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판단을 했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유규한을 충분히 믿었고 유규한이 넘칠 만큼 사랑을 줬다 해도, 한 번 깨진 관계는 결국 예전으로 되돌릴 수 없었다. 며칠 전 유규한은 한 달 동안 무연령 일대로 부대 훈련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송지윤은 어리석게도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갑자기 검진을 받으러 왔다가 이 광경을 보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평생 속고 살았을지도 몰랐다. 송지윤의 감정이 요동치는 걸 알아차렸는지, 뱃속의 아이가 갑자기 거세게 발길질을 했다. 송지윤은 고통스럽게 배를 감싸고 허리를 굽혔다. “아파...” 배만 아픈 게 아니었다.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졌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상한 걸 알아차리고 다급하게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어디가 안 좋으세요?” “밖에 누구야?” 소리를 들은 병실 안 사람들이 일제히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2화 송지윤을 본 유규한은 완전히 당황했다. 유규한은 안고 있던 아기를 황급히 신생아 침대에 눕힌 뒤 성큼성큼 문으로 다가왔다. “여보, 왜 여기 있어?” 나머지 사람들도 송지윤을 발견하자, 곧바로 표정이 굳어졌다. “형... 형수님이 오셨네?” “형수님, 설명부터 들으세요! 진혜라 씨가 출산했다기에 저희가 병문안을 왔어요. 중령님은 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쳐서 함께 모시고 온 것뿐입니다.” “맞아요, 형수님.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이 지경이 됐는데도 유규한의 전우들은 대신 거짓말을 해 주고 있었다. 입을 열 때마다 형수님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송지윤은 속이 뒤집혀서 토할 것만 같았다. 송지윤은 천천히 눈을 들어 유규한을 바라봤다.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당신은? 당신은 뭐라고 설명할 건데?” “여보, 흥분하지 마... 다들 말한 그대로야. 정말 우연히 만났을 뿐이야.” “여기까지 와서도 거짓말을 해?” 심장이 너무 오래 얼음 속에 잠겨 이제는 감각마저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러나 유규한의 거짓말은 남아 있던 송지윤의 마음까지 무너뜨렸다. 송지윤은 손을 번쩍 들어 유규한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어제는 한 달간 무연령으로 부대 훈련을 간다더니, 훈련 장소가 산부인과였어? 유 중령은 이동 속도도 참 빠르네.” 유규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갑자기 일정이 바뀌었어. 미안해, 진정해. 넌 아이까지 가졌잖아.” “제 잘못이에요! 송지윤 씨, 제발 유규한 씨를 때리지 마세요.” 진혜라는 아기를 품에 안은 채 송지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규한 씨는 제가 불쌍해서 곁에 있어 준 것뿐이에요!” “저는 남편을 잃은 여자예요. 기댈 남자 한 사람과 살아갈 힘이 되어 줄 아이만 있으면 돼요! 지윤 씨 남편을 빼앗을 생각은 없어요!” “입 다물어! 유규한의 아이까지 낳아 놓고 빼앗을 생각이 없다고?” 송지윤은 진혜라를 때리려고 손을 들었지만, 유규한이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나를 때리는 건 괜찮아. 혜라 씨는 건드리지 마. 출산한 지 며칠밖에 안 돼서 몸이 약해.” 다른 여자를 감싸는 유규한을 보며 송지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 달 동안 출장을 가서 못 돌아온다던 이유가 여기서 진혜라와 바람을 피우려던 거였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 있어!” 송지윤은 유규한의 손을 힘껏 뿌리친 뒤 다시 손을 들었다. 그때 아기를 안고 바닥에서 일어난 진혜라가 유규한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아기를 앞세우고 뛰어드는 바람에, 송지윤은 미처 손을 거두지 못했다. 손끝이 그만 아이에게 닿았다. “으아앙!” 아기가 높은 곳에서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병실 안의 모든 사람이 혼비백산했다. “아기야, 내 아기!” 진혜라가 울면서 달려가 아이를 끌어안았다. “지윤 씨,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우리 아기는 태어난 지 겨우 나흘이에요. 지윤 씨도 엄마가 될 사람이면서 어떻게 이렇게 잔인해요?”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몰려와 송지윤을 탓했다. “형수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아무리 화가 나도 갓난아기에게 손을 대면 안 되죠!” “저렇게 떨어졌으니 어디를 다쳤을지 몰라요. 중령님, 빨리 의사를 불러야 합니다!” 유규한은 분노에 휩싸여 송지윤을 노려봤다. “송지윤, 오늘 일은 내가 잘못했다는 거 알아! 하지만 저 아이는 내 아들이야! 내 친아들이라고!” “그래?” 송지윤은 유규한을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럼 내 뱃속에 있는 아이는 뭔데?” “아가야, 왜 울음을 멈췄어? 아가야! 규한 씨, 우리 아기가 죽으려나 봐!” 진혜라가 아이를 끌어안고 비명을 질렀다. 당황한 유규한이 외쳤다. “의사 불러! 빨리 의사부터 불러!” 송지윤은 문 앞에 선 채 아무 표정 없이 말했다. “다른 사람을 보내. 유규한, 마지막으로 한 번만 기회를 줄게.” “나와 진혜라, 내 아이와 진혜라의 아이. 둘 중 하나만 택해. 누구를 선택할 거야?” 제3화 유규한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윤아...” “규한 씨, 내가 아이를 데리고 사라질게. 이제부터는 우리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마! 죽어도 상관하지 마!” “혼인신고도 못 했으니 이 아이는 평생 혼외자라는 손가락질을 받겠지. 차라리 내가 아이하고 함께 죽어 버릴 거야!” 진혜라가 아기를 품에 안고 창문으로 뛰어가자, 유규한이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준영이에게 널 지키겠다고 약속했어!” 유규한은 송지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지금 꼭 이런 선택을 강요해야 해? 너 정말 미쳤어!” “혜라 씨가 낳은 아이는 내 아들이야! 내 눈앞에서 아이가 잘못되는 꼴은 못 봐! 이혼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나도 지난 3년 동안 지칠 만큼 지쳤어!” 유규한은 품에 안긴 진혜라를 데리고 다급히 나갔다. 송지윤과 부딪친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만삭이라 몸이 무거운 송지윤은 충격에 균형을 잃고 말았다. 몇 걸음 뒤로 밀려나다가 바닥에 세게 넘어졌다. 극심한 통증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자기가 지쳤다고? 지친 건 나도 마찬가지야.’ 병실에 남은 사람들은 넘어진 송지윤을 부축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송지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질투가 너무 심해서 탈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3년 전에 유 중령님도 돌아와 달라고 매달리지 말았어야지.” “중령님도 지금쯤 후회하지 않을까? 후회해도 떼어 내긴 어렵겠지. 임신 8개월인데 이제 와서 지우라고 할 수도 없잖아.” 사람들은 모두 진혜라를 따라 응급실 쪽으로 몰려갔다. 떠들썩하던 병실에는 송지윤만 홀로 남았다. 배에서 심한 통증이 밀려오자, 송지윤은 지나가던 사람에게 의사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 미래여성병원 진료실. 검사를 마친 산부인과 의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임신 8개월이면 특히 조심하셔야 해요. 어쩌다 이렇게 바닥에 넘어지셨어요?” 송지윤은 눈만 깜박이며 천장만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부주의해서 넘어진 게 아니었다. 유규한이 밀친 것이었다. “유규한 보호자분은요? 함께 오지 않았나요? 예전에는 검진할 때마다 꼭 동행하셨잖아요.” 의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대신 전화해 드릴까요?” 송지윤이 말리지 않자, 의사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유규한 보호자분 맞으시죠? 송지윤 환자가 방금 병원에 왔는데 넘어지는 바람에 뱃속의 아기가...” [송지윤 전화해 달라고 했습니까? 지금 혜라 씨의 아이가 응급 처치를 받고 있는데 뱃속의 아이를 핑계로 질투를 하겠다는 겁니까?] [더는 소란 피우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혜라 씨의 아이가 잘못되면 똑같이 아이로 갚게 할 겁니다!] 전화가 끊겼다. 의사는 영문을 몰라 한동안 굳어 있었다. 송지윤은 말없이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이라도 임신을 끝내고 싶다면...” “송지윤 씨,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기는 벌써 8개월이에요.” “곧 태어날 생명을 지금 유도분만으로 지우게 되면 산모 몸에도 큰 부담이고, 아무 죄 없는 생명까지 해치게 돼요.” 송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말씀 고마워요.” 의사의 말이 옳았다. 아이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이 아이는 송지윤의 아이였다. 앞으로 유규한과는 아무 상관도 없을 터였다. 송지윤은 반드시 유규한과 이혼하고 혼자 힘으로 아이를 키울 생각이었다. 제4화 병원을 나온 송지윤은 눈 덮인 길을 밟으면서 관사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집 앞에 도착하자, 유규한이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유규한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정말 몸이 안 좋은 거야?” 화를 내려고 기다렸던 모양이지만, 새하얗게 질린 송지윤의 얼굴을 보니 정말 아픈 사람 같았다. 송지윤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래. 조금 전 당신이 직접 나를 바닥에 밀어 넘어뜨렸잖아. 기억 안 나?” 그제야 유규한은 자신이 다급히 나가다가 송지윤과 부딪친 일을 떠올렸다. “미안해. 그때 너무 급했어. 다친 데는 없어?” 송지윤은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진혜라의 아이는 어떻게 됐어?” “다행히 괜찮아.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했어.” 유규한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송지윤에게 다가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렀다. “앞으로는 그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될까? 그렇게 어린 아기에게 어떻게 손을 댈 수 있어?” 송지윤은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다 문득 낯선 사람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 마음속에서 내가 그런 사람이야? 진혜라가 일부러 아이를 내 손 앞으로 내밀었다고 하면 믿겠어?” “송지윤!” 유규한의 표정이 어둡게 굳어졌다. “혜라 씨에게 누명 좀 그만 씌워. 3년이나 지났는데 넌 왜 아직도 똑같아?” 예상대로 유규한은 믿지 않았다. 3년 전 진혜라가 처음 집에 왔을 때도 일부러 자기 몸에 뜨거운 물을 쏟고는 지윤이 그랬다고 말했다. 함께 백화점에 갔을 때는 계단에서 스스로 굴러 떨어진 뒤, 지윤이 발을 걸었다고 그랬다. 심지어 한 번은 가위로 자기 몸을 찌르고, 지윤이 죽이려 했다고 울면서 매달렸다. 거듭된 모함과 유규한의 편들기. 다시 합치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송지윤은 정말 지쳤다. “유규한, 조금 전 이혼해도 좋다고 한 말, 아직 유효해?” 이혼이라는 말을 듣자 유규한은 급히 달랬다. “여보, 임신 8개월인 사람이 무슨 이혼 타령이야? 아까 한 말은 화가 나서 내뱉은 것뿐이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마. 난 너와 이혼하지 않을 거야.” 송지윤 되물었다. “당신 아들이 혼외자라고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두렵지 않아?” 유규한은 흠칫했다. “난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 혜라 씨에게는 책임만 느껴.” “준영이는 내 전우였고 죽기 전에 진혜라를 부탁했어. 그러니 외면할 수 없잖아. 혜라 씨에게 우울증이 있다는 것도 알지?” 송지윤 갑자기 웃었다. “우울증이 있으면 당신과 자도 돼? 아이까지 낳아도 되는 거야? 유규한, 진혜라에게는 지켜야 할 선도 없어?” 물론 송지윤도 진혜라에게 우울증이 있다는 말을 알고 있었다. 3년 전 송지윤과 유규한이 이혼 직전까지 간 이유도 진혜라의 우울증 때문이었다. 이준영이 세상을 떠난 뒤 유규한은 진혜라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 무렵 진혜라는 유규한과 송지윤이 어떤 식으로든 가까이 지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손을 잡아도 안 되고, 안는 것도 입을 맞춰도 안 됐다. 같은 방에서 자는 것조차 막았다. 유규한이 조금만 무심하게 굴면 진혜라는 죽겠다며 자해했다. 그럴수록 유규한은 진혜라와 가까워졌고, 밤이면 진혜라의 방에서 함께 지내기까지 했다. 송지윤도 질투하면서 다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유규한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준영이는 내 소중한 전우였고 혜라 씨는 준영이 가장 아낀 사람이야.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넌 나를 이해해 줄 수 없겠어?” 송지윤은 계속 참았다. 그러다 둘이 자신의 침대에서 몸을 섞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제야 더는 견딜 수 없어 이혼을 요구했다. 3년이나 흘렀는데도 유규한은 같은 핑계로 바람을 정당화하려고 했다. ‘정말 역겨워.’ “아이가 태어났으니 이제 진혜라와는 관계하지 않을게. 네가 싫다면, 아이의 가족관계등록도 다른 쪽으로 처리할 수 있어...” 유규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여자가 울음을 터뜨렸다. “규한 씨, 방금 한 말 진심이야? 나와 아들을 버리겠다는 거지?” 진혜라는 얇은 옷차림으로 힘없이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알았어. 내가 아이를 데리고 사라질게. 이제 두 번 다시 규한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진혜라는 울면서 멀리 달아났다. 유규한이 뒤쫓으려고 하자 지윤이 팔을 붙잡았다. 송지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한 번만 애원했다. “유규한, 가지 마.” “미안해. 혜라 씨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워.” 잠깐 망설이던 유규한은 결국 송지윤의 손을 떼어 내고 주저 없이 진혜라를 쫓아갔다. 송지윤은 텅 빈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마음속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무언가마저 완전히 죽었다. ‘유규한, 그렇게 진혜라를 놓지 못하겠다면 나는 당신 없이 아이만 키울게.’ 제5화 혼자 집으로 돌아온 송지윤은 짐을 거의 다 정리한 뒤, 관사 근처에 사무실을 둔 변호사를 찾아갔다. “송지윤 씨, 유규한 중령님이 이미 이혼 서류를 가져가셨는데 모르셨습니까?” 송지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채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늘 오전에 유 중령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협의이혼 서류를 서둘러 준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송지윤 씨와 이혼하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조금 전 작성이 끝난 서류를 받아 가셨고요. 3년 전에 다시는 이혼하지 않겠다고 하셨던 분이라... 저도 조금 의아했습니다.” 변호사의 말을 들은 송지윤은 웃음이 났다. ‘낮에는 병원에서 절대 이혼하지 않겠다고 말해 놓고...’ ‘돌아서자마자 변호사를 찾아와 이혼 서류를 준비했다니. 정말 웃기는 일이네...’ 한참동안 아무 말도 못 하던 송지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뒤 송지윤은 결국 무너졌다. 고개를 든 송지윤의 시선이 침대 머리맡의 앨범에 머물렀다. 사진 속 유규한은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잔꽃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송지윤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 보였다. 그 환한 미소가 이제는 가슴을 저리게 했다. 송지윤은 가위를 집어 두 사람의 웨딩 사진을 난도질했다. 갈가리 찢긴 사진을 액자째 방문 쪽으로 힘껏 던졌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면서 유규한이 들어왔다. 날아간 액자는 정확히 유규한의 몸에 부딪혔다. 웨딩 사진이 바닥에 떨어졌다. 유규한은 조각난 사진을 내려다보다 말없이 허리를 굽히고 사진을 주워들었다. “여보.” 유규한이 옆으로 비켜 들어오자 그 뒤에 서 있던 여자가 보였다. 3년 전과 똑같았다. 유규한은 또다시 진혜라를 집으로 데려왔다. 아이를 안은 진혜라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규한 씨, 지윤 씨와 잘 이야기해. 나 때문에 싸우지 말고.” 말을 마친 진혜라는 가사도우미를 따라 예전에 쓰던 방으로 향했다. “원래는 혜라 씨가 계속 병원에 머물게 할 생각이었어. 네가 이미 다 알게 됐으니 혜라 씨 혼자 병원에 두고 싶지는 않아.” 유규한은 사진을 원래 자리에 놓고 송지윤 곁으로 다가왔다.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혜라 씨도 네가 고의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용서하겠대. 여보, 앞으로는 아이를 해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줄래?” 송지윤은 말없이 유규한만 바라봤다. 유규한도 한동안 침묵하다 마침내 준비해 온 이혼 서류를 꺼냈다. “혜라 씨에게 다른 뜻은 없어. 아이를 떳떳하게 가족관계등록부에 올리고 출생 축하파티를 열고 싶을 뿐이야.” “그러니까 우리 잠시만 이혼하면 안 될까? 아이의 축하연만 끝나면 다시 혼인신고 하자.” “한 달이면 돼. 길어도 한 달이야. 우리 아이가 태어나는 대로 바로 너와 다시 혼인신고할게.” 송지윤 서명란을 보니 유규한의 이름은 이미 적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송지윤은 슬픔도 허탈함도 느끼지 않았다. 도리어 홀가분해졌다. “그래.” 송지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있던 펜을 들어 자기 이름을 적었다. 유규한과 이혼 서류에 서명하는 건 두 번째였다. 송지윤은 세 번째는 절대 없을 거라고 다짐했다. ‘다시 혼인신고를 해?’ ‘꿈도 크지.’ “역시 우리 여보가 좋은 사람이야.” 유규한은 서명된 이혼 신청서를 쥐고 기뻐하며 송지윤을 안으려고 했다. 송지윤은 말없이 한 걸음 물러나면서 조용히 말했다. “진혜라에게 가져가 보여줘. 아주 좋아할 테니까.” “역시 내 여자야. 언제나 너그럽고 착해! 당장 혜라 씨에게 보여줘야겠네.” 유규한은 서둘러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송지윤은 씁쓸하게 웃었다. ‘유규한, 여자가 더는 남자에게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이미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그것도 몰라?’ 제6화 그날 밤 유규한은 부부의 침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밤중에 잠에서 깬 송지윤은 갑작스러운 다리 경련에 신음했다. 통증을 참으며 일어난 송지윤은 유규한을 찾으러 가려고 했다. 간신히 방문을 나와서 진혜라의 방 앞까지 힘겹게 걸어갔다. 문을 두드리려던 송지윤 입을 열었다. “유규한, 다리에 쥐가 났어. 혹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 안쪽에서 여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규한 씨...” “쉿. 목소리 낮춰. 아이가 깨겠어.” 송지윤은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허벅지의 경련은 파도처럼 계속 번져 갔다. 하지만 가슴속의 고통은 육체의 통증보다 훨씬 심했다. 얇은 나무문 너머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들렸다. 이어지는 거친 숨소리와 신음소리가 무거운 망치가 되어 송지윤의 가슴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천장을 올려다보던 송지윤은 임신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를 떠올렸다. 원래 몸이 약했던 송지윤은 임신 초기에 거의 날마다 토했다. 밤마다 잠들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다. 송지윤이 토할 때마다 유규한은 곧장 일어나 따라왔다.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며 안타까운 눈으로 말했다. “여보, 임신이 이렇게 힘든 줄 알았다면, 평생 아이 없이 살아도 좋다고 했을 거야!” 임신 후기로 접어든 뒤에는 자주 다리에 쥐가 나서 한밤중에 꼼짝도 하지 못 했다. 그럴 때면 유규한이 인내심 있게 다리를 주물러줬다. 8개월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지친 기색도 내지 않았다. 이제 유규한은 송지윤의 곁이 아니라 다른 여자의 방에서 뜨거운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규한 씨, 나 정말 행복해! 드디어 규한 씨와 결혼할 수 있잖아. 한 달만 부부로 살아도 충분히 만족해.” “내가 미안해. 너를 이렇게 마음고생을 시켰네. 앞으로는 너와 아이에게 잘할게.” “규한 씨, 사랑해. 정말 사랑해!” 두 사람의 격한 신음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어느새 송지윤의 다리 경련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대신 온몸의 힘이 모두 빠져나간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송지윤은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처참할 만큼 완벽한 패배였다. 그럼에도 늦기 전에 이 관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유규한과 진혜라는 집 안에서 갈수록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식사 때면 유규한이 진혜라의 접시에 반찬을 얹어 줬다. 쉬는 시간에는 둘이 마당에 나란히 앉아서 햇볕을 쬐며 웃고 떠들었다. 밤이면 진혜라의 방에서 늘 은밀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송지윤은 보고도 못 본 척했다. 묵묵히 자기 물건을 정리하고, 멀리 부남시에 사는 부모님께 연락한 뒤 떠날 때의 고속열차 표까지 예매했다. 송지윤은 이혼 신고가 처리되는 날까지 서로 건드리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혜라는 그 정도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해 질 무렵, 송지윤은 마당의 연못가에 작은 의자를 놓고 앉아서 뱃속의 아이에게 입힐 털옷을 뜨고 있었다. 내일이면 이혼 절차가 완전히 끝난다는 생각에, 마음은 오랜만에 가벼워졌다. 오늘은 이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었다. 그 마지막 하루조차 조용히 넘기기는 어려울 듯했다. 진혜라가 갑자기 아들을 품에 안고 나타났다. “지윤 씨는 참 여유롭네요. 내일이면 중령님과 이혼하면서도 이렇게 한가롭게 뜨개질이 돼요?” “그날 밤 지윤 씨가 밖에 있는 줄 알았어요. 일부러 들으라고 그런 거예요. 규한 씨와 내가 얼마나 뜨거운 사이인지 알려 주고 싶었거든요!” “전 규한 씨를 사랑하고 규한 씨도 나를 사랑해요. 침대에서는 저를 통째로 삼키고 싶을 만큼 좋다고 했어요.” “지윤 씨는 고지식하고 재미도 없어서 조금도 끌리지 않는대요!” “내일은 우리 아들의 출생 축하 파티가 열려요. 당연히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 주겠죠? 그래도 아이의 큰어머니가 될 사람이잖아요.” 제7화 진혜라가 아무리 도발해도 송지윤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털옷을 계속 떴다. 송지윤이 무시하자, 화가 난 진혜라는 송지윤의 손에서 털옷을 빼앗아 연못에 던져 버렸다. “귀가 먹었어요? 내가 하는 말이 안 들려요?” 송지윤도 결국 참지 못했다.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털옷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려가서 주워.” “싫어요. 안 주우면 어쩔 건데요?” “안 주워? 그럼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원망하지 마.” 송지윤이 한 걸음씩 다가가자, 진혜라는 연못 가장자리까지 밀려났다. 진혜라가 손을 뻗어서 송지윤을 막 연못으로 밀려고 할 때, 멀리서 걸어오는 유규한이 곁눈에 들어왔다. 진혜라의 입가에 기묘한 미소가 걸렸다. 손에 쥔 물건 하나를 연못으로 던졌다. “지윤 씨, 안 돼요!” 진혜라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우리 아기 액막이 금팔찌예요! 며칠 전 규한 씨가 사찰에서 축원까지 받아온 거라고요!” “지윤 씨가 바닥에 떨어뜨린 뒤로 아기가 계속 아팠는데, 그 팔찌 덕에 겨우 버티고 있었어요.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어요!” “무슨 소리야? 방금 네가 직접...” 송지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진혜라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었다. 진혜라는 거짓 연기에 너무도 능숙했다. “송지윤!” 송지윤이 해명할 새도 없이, 유규한이 성난 걸음으로 다가와 손목을 거세게 움켜잡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규한 씨, 나 이 집에서 더는 못 살겠어! 지윤 씨는 우리 아기가 죽기를 바라고 있어!” “내가 인사하려고 다가가서 규한 씨가 사찰에서 아기의 무사함을 빌며 받아온 금팔찌 이야기를 했더니, 갑자기 연못에다 내던졌어.” “우리 아기 따위는 팔찌를 찰 자격도 없고 애초에 죽었어야 한다고 했어!” “규한 씨하고 이혼해도 자기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 아들은 결국 혼외자일 뿐이라고도 했고!” “정말 그런 말을 했어? 송지윤, 진혜라를 받아들이려고 이혼에 동의한 줄 알았는데 전부 거짓말이었어?”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붙잡힌 손목이 부서질 듯 아팠다. 송지윤은 고개를 저었다. “금팔찌도 진혜라가 직접 던졌어! 나와는 상관없어!” “스님이 그 팔찌는 물에 닿으면 효험이 사라져서 아이에게 나쁜 일이 생길 수 있다고 했어! 혜라 씨가 자기 아이의 목숨을 걸고 나를 속일 리 없잖아!” 유규한의 눈에는 짙은 혐오가 일렁였다. “송지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 거야? 너도 아이를 가졌잖아. 우리 아이에게 그 업보가 돌아갈까 두렵지도 않아?” 목구멍으로 비릿한 기운이 치밀었다. 송지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유규한을 올려다봤다. “유규한, 진혜라의 아이 때문에 우리 아이를 저주하는 거야?” “당신은 진혜라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라! 나를 모함하려고 갓난아기를 일부러 떨어뜨린 여자야. 금팔찌 하나 던지는 게 뭐가 어렵겠어!” “그만해! 입 다물어!” 유규한은 손을 들어 송지윤의 뺨을 거칠게 때렸다. 예상하지 못한 폭력에 송지윤은 중심을 잃고 연못으로 떨어졌다. 몸이 물속으로 가라앉으면서 차가운 물이 코와 귀를 덮치자, 송지윤은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물가에 선 유규한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차디찬 목소리만 날아왔다. “연기 그만해, 송지윤. 너 수영할 줄 알잖아! 금팔찌를 던졌으니까 네 손으로 건져 와!” “거기 누구 없어?” 유규한은 부하들을 불러서 냉혹하게 명령했다. “금팔찌를 찾아올 때까지 지켜봐. 못 찾으면 절대 물 밖으로 나오게 하지 마!” 물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송지윤을 본 부하 한 명이 망설이며 말했다. “하지만 중령님, 사모님은 임신 중입니다...” 진혜라도 짐짓 걱정하는 척했다. “그냥 그만두면 안 될까? 지윤 씨도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을 거야. 뱃속의 아이가 잘못되면 어떡해?” 제8화 “임신하면 수영도 못 하나?” 유규한이 비웃었다. “임신했다는 이유로, 내가 사랑하고 아껴 준다는 이유로 내 말을 우습게 여기니까 이런 짓까지 하는 거야!” “혜라씨, 들어가자. 신경 쓰지 마. 아이가 정말 잘못돼도 지윤이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야!” 송지윤은 연못에 몸을 담근 채 진혜라를 감싸고 떠나는 유규한의 뒷모습을 보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눈에서는 참았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그리고 임신 사실을 확인한 날, 유규한이 눈이 빨개지도록 울던 모습이 떠올랐다. 유규한은 송지윤을 품에 꼭 안고 거듭 말했다. “여보, 드디어 우리에게 아기가 생겼어! 이제 넌 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 내가 맹세할게. 평생 너와 아기가 조금도 억울한 일을 겪게 하지 않겠어.” 그런 유규한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그는 거짓말뿐인 다른 여자를 위해 임신한 아내의 뺨을 때리고 연못에 빠뜨렸다. 심지어 아내에게 그 여자가 낳은 아이의 금팔찌를 찾으라며, 물속에 가둬 두기까지 했다. 송지윤의 상태를 본 부하가 안쓰러워하면서도 재촉했다. “사모님, 서둘러 찾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벌써 임신 9개월이라 언제 진통이 올지 모릅니다. 혹시라도 잘못되실까 봐 걱정됩니다.” 낯선 사람도 걱정해 주는데 남편인 유규한은 이렇게까지 잔인했다. 송지윤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물속으로 몸을 깊이 숙여서 금팔찌를 몇 번이고 찾아 헤맸다. 해가 떠 있던 때부터 어둠이 내릴 때까지 연못 물은 갈수록 차가워졌다. 송지윤은 온몸을 떨면서도 금팔찌를 찾지 못했다. 임신 8개월의 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바닥까지 잠수해 손을 더듬을 때마다 오장육부가 뜯겨 나가는 듯 아팠다. 물가에서 지켜보던 부하들도 더는 두고 보기 힘들었다. “벌써 밤 10시입니다. 이대로 두면 사모님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겁니다.” “그래도 중령님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잖아.” 꼬박 4시간이 지났다. 송지윤의 손발은 물에 불어서 하얗게 변한 지 오래였다. 더는 버티기 어려워질 무렵, 뱃속의 아이도 거듭 몸부림치며 송지윤의 배를 찼다. 발길질은 갈수록 거세졌고 곧 아래로 잡아당기는 진통으로 바뀌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를 만큼 심한 통증이었다. 다리 사이로 뭔가 흘러내리는 감각까지 느껴졌다. 마침내 부하 한 명이 놀라 외쳤다. “피입니다! 빨리 사모님을 끌어 올려요. 중령님께도 바로 전화해!” 전화는 곧 연결됐지만, 수화기 너머에서는 진혜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 중령님은 지금 우리 아이와 함께 있어서 통화할 수 없어요. 송지윤이 금팔찌를 찾기 전에는 물 밖으로 나오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통화는 곧바로 끊어졌다. 부하들은 거의 의식을 잃은 송지윤을 보며 다급히 말했다. “명령은 나중 문제야. 일단 사모님을 병원으로 모시자. 이러다 아이까지 목숨을 잃겠어!” 부하들이 송지윤을 안아 들고 저택 밖으로 뛰쳐나갈 때, 송지윤은 고개를 돌려 집 쪽을 한 번 바라봤다. 창문에는 따뜻한 불빛이 켜져 있었다. 유규한은 진혜라와 진혜라의 아들 곁에서 단란한 가족의 시간을 즐기고 있을 터였다. ‘나는?’ 송지윤과 뱃속 아이는 목숨을 잃을 지경이었다. 병원에 실려 왔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 배가 뒤틀리듯 아팠고 시야는 온통 까맣게 변하면서 흐려졌다. 의료진이 송지윤을 다급히 수술실로 밀고 갔다. “산모에게 출혈이 있습니다. 조산이 시작된 것 같아요. 서두르세요!” “제발... 우리 아이를 살려주세요...” “안심하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사가 급히 물었다. “보호자는 어디 있습니까? 어서 보호자에게 연락하세요!” 부하들은 망설일 틈도 없이 유규한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을 걸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아예 수신을 거절했다. 부하 중 한 명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중령님이 지금 자리를 비우기 어려워서...” 의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아내가 이 지경인데 대체 뭘 하느라 전화도 안 받고 끊는 겁니까? 수술 중 산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요?” 제9화 “아악, 너무 아파요!” 송지윤은 비명을 참지 못하고 의사의 손을 힘껏 붙잡았다. “제발 아이를 살려주세요. 제 뱃속에서 9개월을 자란 아이예요. 꼭 낳고 싶어요! 이제 전화하지 마세요. 수술실로 데려가 주세요. 무슨 일이 생겨도 제가 책임질게요!” 그 말을 끝으로 송지윤은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의식이 멀어지기 직전에 유규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송지윤에게 차갑게 굴다 보면 그 업보가 뱃속 아이에게 돌아갈 수도 있는데, 두렵지 않냐고 말했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가 정말 잘못되더라도, 그 모든 게 송지윤이 저지른 죄의 대가라고까지 몰아붙였다. 그 말들만으로도 유규한은 송지윤의 아이에게 아버지가 될 자격을 잃었다. 얼마나 오래 의식을 잃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희미하게 정신을 차린 송지윤은 주위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서두르세요. 양수가 터졌고 태아의 심박이 약합니다. 당장 수술해야 해요!” “송지윤 씨 아니에요? 유 중령님은 어디 있죠?” “유규한 씨 말이에요? 오늘 자기 아들의 출생 축하 파티를 연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무슨 축하 파티예요? 아내는 여기 있고 아이도 아직 뱃속에 있는데요!” “내연녀가 낳은 아이겠죠. 그 내연녀도 여기서 출산했다잖아요!” “대체 어떤 남편이 그래요? 매번 검진 때마다 송지윤 씨와 같이 오기에, 정말 아내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전부 가짜였네요!” “송지윤 씨, 정신 놓으면 안 돼요. 힘내세요. 아기가 곧 나올 겁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간호사가 아이를 안고 송지윤 곁에 서 있었다. “송지윤 씨, 축하해요. 건강한 딸이에요.” 그때 부대의 법무 담당자가 찾아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송지윤 씨, 협의이혼 절차가 모두 완료됐습니다. 확인서입니다.” 서류를 받아 든 송지윤은 서류에 찍힌 직인을 한참 바라봤다. 그 순간, 오랫동안 가슴속에 눌러 담고 있던 무거운 감정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송지윤은 간호사를 올려다보며 나직이 부탁했다. “기차역에 연락하는 걸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최대한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어요.” ... 출생 축하 파티가 열리는 연회장. 유규한은 이른 아침부터 진혜라와 함께 집을 나섰다. 전우들이 하나둘 찾아와서 유규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해. 아이 이름은 정했어?” “유 중령, 이렇게 좋은 날 송지윤 씨는 왜 안 보여? 아직 자네와 진혜라 씨를 받아들이지 못한 건가?” “그러게. 형수님도 참 속이 좁네.” 유규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유도 모를 불안감이 자꾸 가슴을 짓눌렀다. 축하연이 시작될 때가 됐는데도 송지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도 나한테 화가 난 걸까?’ ‘어제는 나도 화가 치밀어 그랬을 뿐이지, 일부러 다치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진혜라가 아이를 안고 유규한을 재촉했다. “다들 들어오라고 해, 규한 씨. 지윤 씨는 안 올 것 같으니 이제 그만 기다리자.” 유규한이 핸드폰을 꺼내 송지윤에게 전화하려고 하자 진혜라가 막았다. “일단 들어가면 안 돼? 시작 시간을 넘기면 손님들 보기에 안 좋잖아.” 유규한은 듣지 않고 전날 걸려 온 번호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 “어젯밤에 왜 그렇게 계속 전화한 거야? 집사람은 어디 있어? 혜라 씨 아들의 축하 파티에 데려와.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게 해야지.” 부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중령님, 사모님은 어젯밤 연못에서 4시간을 버티다 과다 출혈을 일으켰습니다. 저희가 겨우 발견하고 급히 미래여성병원으로 모셨습니다.] [의료진이 밤새 응급 수술을 해서 간신히 사모님을 살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태어났을 때...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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