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사회심리학 교수님이 우리에게 간단한 과제를 내주셨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사랑해'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상대방이 처음 보이는 반응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내 부모님은 7년 전, 델루카 가문을 노린 습격에 휘말려 돌아가셨다.
문자를 보낼 사람이 달리 없었던 나는 뉴욕 암흑가의 최연소 보스이자, 한때 법원이 나의 임시 후견인으로 지정했던 남자, 로만 델루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밤새도록 반복됐다.
그리고 새벽 2시가 되어서야 그의 답장이 왔다.
[마라, 의존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마라. 우리 사이에 무엇이 존재하든, 절대로 그 선을 넘을 수 없어.]
다음 날, 그는 그동안 내게 주었던 모든 특권을 거둬들였다.
우리의 전용 연락망을 끊었고, 자신의 최측근인 루카에게 더는 나에 관한 것은 그 무엇도 보고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내가 로어 맨해튼에 있는 델루카 타워로 찾아갔을 때, 경비들이 회전문 앞에서 나를 막아 세웠다.
“보스께서 직접 내린 지시입니다. 오늘 밤 라이벌 조직원들이 들어오는 건 허락할 수 있어도 당신은 절대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로 로만은 파티나 복도에서 나와 마주칠 때마다 먼저 자리를 피했다
그는 그렇게 6개월 동안 나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로부터 내 뇌 속에 공격적이고 악성도가 높은 신경교종이 자라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 종양은 언어와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를 압박하고 있었고, 내게 남은 시간은 어쩌면 단 한 번의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을 정도뿐일지도 몰랐다.
1장
어쩌면 내 생애 마지막 봄이 될지도 모를 그때, 나는 로만이 내 짝으로 점찍어 둔 남자 엘리아스 하트를 계속 만나기로 했다.
그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야 내가 더 이상 그가 바로잡아야 할 '오점'이 아니라고 믿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그날 밤, 로만은 몇 주 만에 처음으로 웨스트체스터에 있는 델루카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는 검은색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서재 벽난로 앞에 서서, 불을 붙이지 않은 시가를 손가락 사이로 굴리고 있었다.
로만은 내 앞에서 담배를 피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온기의 조각조각마저 아껴가며 보낸 지난 6개월 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그 버릇만큼은 지키고 있었다.
“엘리아스는 어때?”
로만은 나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몇 번이나 만났지?”
“네 번이요.”
“청혼은 했고?”
나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엘리아스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곁에 있어주는 친구일 뿐, 구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내 손을 잡아본 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로만의 목소리는 너무나 태연해서, 마치 마침내 성사된 거래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있는 사람 같았다.
“거의 다 됐어요.”
로만의 손가락이 시가를 감싼 채 멈췄다.
나는 몇 달 만에 나눈 이 대화를 허무하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기에, 예전에 혼자 상상해보곤 했던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만약 결혼하게 된다면, 유리 천장에 겨울 아네모네를 매달고 싶어요. 하얀 다이아몬드는 싫고. 꿀빛이 나는 타원형 보석이 좋겠어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결혼식이 끝난 뒤에는 고급 승용차 행렬 같은 것도 필요 없어요. 그냥 오래된 파란색 컨버터블 타고 허드슨강을 따라 북쪽으로 쭉 달리는 거죠.”
내가 하나씩 세부적인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만.”
로만이 말했다.
“네가 네 스스로의 삶을 시작할 마음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그는 마치 다음 말을 억지로 뱉어내기 위해 양손을 모두 비워야 한다는 듯이 시가를 케이스에 다시 집어넣었다.
“네 부모님은 널 내게 맡기셨어, 마라. 나는 네 보호자였고 그 사실은 사라지지 않아.”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곳엔 언제나 네가 머물 방이 있을 거야.”
나는 문 옆에 포개져 있는 두 개의 상자를 바라보았다.
내 옷과 책, 그리고 부모님이 내게 남겨주신 사진들은 이미 스위스로 향하고 있었다. 누구도 내가 떠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침실에는 오래된 물건 몇 가지만 남겨두었다.
“날 위해 방을 비워둘 필요 없어요.”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마 다시는 뉴욕에 살 일은 없을 테니까요.”
‘아마’가 아니었다. 두 번째로 수술실의 불빛 아래 눕게 되든, 그렇지 않든 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취리히의 신경종양 센터에서는 각성 상태에서 진행하는 개두술을 시행하고, 나를 개인 맞춤형 백신 임상시험 대상자로 검사해주기로 했다.
이틀 뒤, 나는 로만이 시에나 카루소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그날 아침에 뉴욕을 떠날 참이었다.
로만이 고개를 들었고, 그의 눈빛에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에나는 어떤 꽃을 좋아해요?”
“버건디색 라넌큘러스.”
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가슴이 조여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그 사람은 골동품이나 보석을 좋아해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
로만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선물도 보내지 말고, 귀찮게 하지도 마.”
그는 내가 결혼식을 망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6개월 전의 나는, 열이 나는 내 곁에 밤새 앉아있어 줄 수 있으면서 왜 나를 잃는 것이 아플 거라는 사실만큼은 인정하지 못하냐며, 이 저택에서 그를 쫓아다니며 따져 물었었으니까.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내뱉었던 그 말들을 기억하는조차 버거웠다.
종양은 언어와 시간, 그리고 익숙한 길들을 하나씩 앗아가고 있었다.
어제는 커피 메이커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부엌에 10분 동안 서 있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는 로만이 누군가를 지극히 사랑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꽃, 드레스 사이즈, 항공편 번호, 그리고 단 한 번 스쳐 지나가듯 말한 소원까지 모두 기억해 두곤 했다.
시에나는 그런 로만을 가졌다. 그녀는 내게서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떠나기 전에 델루카 가문에 진 빚을 정리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 순간, 무언가 타는 듯한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신경과 전문의는 그것이 실제가 아니라고 경고했었다. 측두엽의 자극으로 인해 환각 냄새가 나는 것이며, 대개 발작이 일어나기 몇 초 전에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시야에 번진 검은 점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로만이 내게 다가왔다.
“왜 그래?”
“혈당이 좀 떨어졌어요.”
그가 내 이마를 향해 손을 뻗더니, 내 피부에 닿기 직전 멈추었다. 부모님의 장례식장에서 나를 이끌어 주었던 그 손이 주먹을 쥔 채 그의 옆구리로 툭 떨어졌다.
“가서 좀 자.”
로만이 말했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이토록 염려가 묻어나는 투를 듣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말은 차마 하지 않은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
2장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내가 어떻게 침대 옆 융단 위에 누워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휴대전화에는 알람 세 개가 떠 있었다.
[레베티라세탐 복용하기]
[엘리아스 만나기]
[로만에게 말하지 않기]
마지막 알람은 내가 직접 적어둔 것이었지만, 그 문장의 의미가 머릿속에 와닿기까지 거의 1분 동안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10시가 되자, 조경 작업 인부들이 동쪽 별관 바깥에 있던 하얀 치자나무 온실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내 열여덟 번째 생일날, 가족 회의장을 중간에 차고 나온 로만이 해가 뜨기도 전에 뚝딱 지으라고 명령했던 바로 그 온실이었다.
이제 인부들은 마지막 화분 나무를 트럭으로 옮겨 실어가자, 그 자리에는 시에나를 위한 버건디 라넌큘러스 상자들이 연회장 안으로 차곡차곡 들어섰다.
나는 아무것도 파괴하고 있지 않았다. 단지 더 이상 내 차지가 아닌 공간을 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 오후, 나는 소호의 한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엘리아스를 만났다.
그는 유서 깊은 보스턴 정치가 가문 출신이었고, 로만의 눈에는 완벽한 선택지였다. 깨끗하고 안전하며, 델루카 가문의 세계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나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사람.
엘리아스는 나를 보자마자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지난주보다 안색이 더 안 좋아 보이네. 의사는 뭐래?”
나는 최신 스캔 사진을 테이블 너머로 밀어놓았다. 흑백 이미지 속에서, 왼쪽 측두엽을 타고 퍼져나가는 그림자는 종이에 번지는 잉크처럼 보였다.
“빠르게 커지고 있대요. 바이스 박사님은 수술이 언어 능력과 장기 기억을 손상시킬 수 있다고 하셨어요.”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어쩌면…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대요.”
“로만은 알아?”
“아니요.”
“마라, 그 사람에게는 알 권리가...”
“없어요.”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내가 18살이 되면서 법적 보호자 관계는 끝났어요. 그 사람에게는 내 치료법을 결정할 권리가 없어요.”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게다가 그 사람이 살려내지 못할지도 모를 내 삶을 결혼식 날 그 사람에게 짐처럼 떠넘기고 싶지도 않고요.”
나는 가방에서 짙은 녹색 서류철을 꺼냈다.
그 안에는 7번 부두에 있는 보세 창고 세 곳의 소유권 증서와 베넷 마리타임의 영구 의결권 위임장, 그리고 아버지의 개인 금고를 여는 황동 열쇠가 들어 있었다.
그 부두는 부모님 회사의 마지막 남은 조각이자, 7년 전 델루카 가문이 습격을 받았던 진짜 이유이기도 했다. 부모님은 장갑차로 봉쇄선을 뚫고, 중상을 입은 로만을 구조선에 태워 보냈다.
그리고 그를 따라 탈출하기도 전에 화염에 휩싸인 창고 안에서 숨을 거두셨다.
로만은 나를 살려두기 위해 7년이라는 세월을 바쳤다. 부두를 돌려주는 것이 그에게 진 빚을 청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예식이 끝나면 그 사람에게 이걸 전해줘요.”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 내가 수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델루카 저택에 살았던 걸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고 말해주세요.”
엘리아스는 서류철을 건드리지 않은 채 그대로 두었다.
“넌 그 남자를 사랑하면서 나한테는 마치 변호사라도 된 것처럼 네 유품을 전달해달라는 거야?"
“한때는 사랑했었어요.”
그 말을 내뱉고도 생각했던 것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어쩌면 종양은 기억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고 있는지도 몰랐다. 한때 나를 잠 못 들게 했던 수치심, 갈망, 그리고 결핍은 기억과 함께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로만은 칼로 나를 밀어냈고, 내 뇌는 그 단절을 완성해 가고 있는 셈이었다.
마침내 엘리아스가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결혼식이 끝나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저택으로 돌아오자, 가정부 노라가 스위스에서 온 은회색 의료용 케이스를 내게 건넸다. 안에는 수술용 내비게이션 프레임과 병원 팔찌, 비상 연락처가 저장된 기본형 휴대전화가 들어 있었다.
나는 옛 휴대전화에 있던 이름들을 엘리아스와 안야 바이스 박사만 남을 때까지 하나씩 지워 나갔다.
로만의 이름은 한참 동안 화면에 남아 있었다.
결국 나는 그 이름을 지우지 못했다. 다만 연락처 이름을 ‘집’에서 ‘로만 델루카’로 바꾸었을 뿐이었다.
3장
로만은 결혼식 전날 자정이 지나서야 저택으로 돌아왔다.
나는 침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부모님의 결혼사진을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때 또다시 그 매캐한 냄새가 밀려왔다. 약에 손을 뻗기도 전에 오른손이 경련을 일으키며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에서 유리잔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나는 일어나려 애썼지만 다리가 풀리며 침대 모서리에 부딪혔다. 정신을 차리고 방 안이 다시 초점을 되찾았을 때, 로만은 문을 박차고 들어와 내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마라, 날 봐.”
그가 내 목덜미를 받쳐 들었다. 몇 달 동안 내게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던 그의 목소리가 당혹감으로 인해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혀 옆쪽을 깨물고 말았다. 입가에는 따뜻한 피가 번져 있었고, 깨진 유리 조각 사이로 항경련제 알약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처방전 라벨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약병을 뒤집어 확인하기만 하면, 내가 숨겨온 거짓말은 들통나고 말 것이다.
나는 그보다 먼저 약병을 낚아채듯 집어 들어 침대 밑 의료용 케이스 안에 쑤셔 넣었다.
“편두통 때문에 그래요. 너무 갑자기 일어서서…"
로만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그러니까 내 결혼식 전날 밤에 내 앞에서 쓰러지는 걸 택했다, 이거야?”
나지막하게 깔린 그의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더 잔인하게 들렸다.
그는 내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직접 보았다. 그저 그걸, 내가 자신을 붙잡기 위해 벌이는 또 하나의 필사적인 연기라고 믿는 편을 택했을 뿐이었다.
“네.”
나는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유리잔이 깨져서 석류 주스를 쏟았어요. 카펫을 더럽혀서 죄송해요."
거의 텅 빈 방 안을 둘러보는 그의 턱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그러다 내 사진들이 걸려 있던 휑한 벽에 시선이 멈췄다.
“물건들은 다 어디 갔어?”
“기부했어요.”
“왜?”
“결혼하잖아요. 이제 이 저택을 관리할 새로운 안주인도 들어올 테고.”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 침실을 무덤처럼 그대로 남겨두는 건 좀 소름 끼치잖아요.”
로만이 벌떡 일어섰다.
“누구 마음대로 내 집에 둘 물건을 결정한다는 거지?”
그의 분노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게 독립적인 삶을 살라고 명령한 것도, 자신이 정해놓은 선을 넘지 말라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했던 사람도 역시 그였다.
“알겠어요. 내가 결정하지 않을게요.”
나는 마지막 액자를 여행 가방에 넣었다.
“당신과 시에나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델루카 가문에 다시는 약점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요.”
그의 회색 눈동자 뒤로 폭풍이 몰려들었다.
“나한테 할 말이 그게 다야?”
“아니요.”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고마웠어요.”
그 한 마디가 어떤 비난보다도 그에게 묵직하게 박혔다.
나는 그의 곁을 지나쳐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가 내 이름을 부른 것 같았지만 목소리가 너무 희미해서 그것마저 내 뇌가 만들어낸 또 다른 착각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
동이 틀 무렵, 검은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차량들이 원형 진입로를 가득 메웠다.
가문의 수장들과 주 상원의원들, 은행가와 변호사들이 금속 탐지기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고, 델루카 가문과 카루소 가문의 권력이 결합하는 그 결혼식을 포착하려는 뉴스 취재용 헬리콥터들이 허드슨강 상공을 맴돌았다.
나는 회색 캐시미어 코트를 걸치고 의료 의료용 케이스를 발치에 내려놓았다.
로만이 검은 턱시도를 입고 내 방 앞에 나타났다. 옷깃부터 커프스 링크까지 모든 디테일이 완벽했지만, 눈 밑에 드리운 그늘은 그가 밤을 지새웠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내 코트에서 여행 가방으로 옮겨갔고,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 차림으로 교회에 가겠다고?”
“나는…”
아래층에서 루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스, 카루소 가문 차량들이 도착했습니다.”
로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내 의료용 케이스에 찍힌 스위스 병원의 로고에 고정되었고, 나는 그가 모든 진실을 알아차리려 한다는 위험한 순간이라는 것을 느꼈다.
나는 코트를 끌어당겨 로고를 가렸다.
“옷 갈아입어.”
로만이 명령했다.
“나랑 같이 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돌아섰을 때,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안녕, 로만.'
차량 행렬이 떠난 지 10분 뒤, 나는 예약해둔 검은색 타운카에 올라탔다.
JFK 공항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의 커다란 전광판들에서는 결혼식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카메라가 교회 천장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유리 돔 아래로 수천 송이의 겨울 아네모네가 매달려 있었고, 제단 중앙에는 꿀빛의 타원형 다이아몬드가 반지 쿠션 위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 아주 사소한 디테일 하나까지 전부 다 묘사했던 바로 그 결혼식이었다.
단지 내가 신부가 아닐 뿐이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고 탑승이 시작될 무렵, 엘리아스에게서 온 메시지 세 개가 화면에 떴다.
[로만에게 소유권 증서를 전달했어.]
[그 사람이 네 의료 동의서를 봤어... 더 이상 너를 위해 거짓말을 해줄 수가 없었어.]
[마라, 그 사람은 네가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버렸어.]
곧이어 로만의 이름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나는 전화를 거절했다.
곧바로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
[마라, 그 비행기 타지 마. 나 그 여자랑 결혼 안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