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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시작되기 두 시간 전
윤지원이 술에 취한 윤주혁과 하룻밤을 보낸 날, 윤주혁은 전 여자 친구와 막 헤어진 상태였다. 윤주혁은 책임을 지겠다며 윤지원과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별다른 문제 없이 평온하게 흘러갔다. 윤지원은 이런 나날이 영원히 이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윤주혁의 전 여자 친구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윤주혁은 전 여자 친구를 추모하러 갔다가 뒤늦게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거 전 여자 친구가 자신과 윤지원이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완전히 마음을 접은 채 떠났다는 것을.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윤지원은 남몰래 윤주혁을 좋아하며 써 온 일기장까지 윤주혁에게 들키고 말았다. 윤주혁은 윤지원이 두 사람의 관계를 일부러 망가뜨렸다고 단정했다. 윤지원을 뼛속 깊이 증오한 윤주혁은 결국 이혼을 요구한 뒤 윤지원을 빈손으로 내쫓았고 사사건건 앞길을 가로막았다. 죽음을 앞둔 순간, 윤지원의 귓가에는 윤주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맴돌았다. “네 사랑은 정말 역겨워.” 다시 눈을 떴을 때, 윤지원은 윤주혁이 이별의 아픔을 잊으려 술을 마시던 날, 두 사람이 하룻밤을 보내기 두 시간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윤지원은 외투를 집어 들자마자 방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곧장 윤주혁의 전 여자 친구가 머무는 방으로 달려가 망설임 없이 문을 두드렸다.
챕터 (1)
1화
윤지원이 술에 취한 윤주혁과 하룻밤을 보낸 날, 윤주혁은 전 여자 친구와 막 헤어진 상태였다.
윤주혁은 책임을 지겠다며 윤지원과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별다른 문제 없이 평온하게 흘러갔다.
윤지원은 이런 나날이 영원히 이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윤주혁의 전 여자 친구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윤주혁은 전 여자 친구를 추모하러 갔다가 뒤늦게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거 전 여자 친구가 자신과 윤지원이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완전히 마음을 접은 채 떠났다는 것을.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윤지원은 남몰래 윤주혁을 좋아하며 써 온 일기장까지 윤주혁에게 들키고 말았다.
윤주혁은 윤지원이 두 사람의 관계를 일부러 망가뜨렸다고 단정했다.
윤지원을 뼛속 깊이 증오한 윤주혁은 결국 이혼을 요구한 뒤 윤지원을 빈손으로 내쫓았고 사사건건 앞길을 가로막았다.
죽음을 앞둔 순간, 윤지원의 귓가에는 윤주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맴돌았다.
“네 사랑은 정말 역겨워.”
다시 눈을 떴을 때, 윤지원은 윤주혁이 이별의 아픔을 잊으려 술을 마시던 날, 두 사람이 하룻밤을 보내기 두 시간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윤지원은 외투를 집어 들자마자 방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곧장 윤주혁의 전 여자 친구가 머무는 방으로 달려가 망설임 없이 문을 두드렸다.
제1화
윤지원을 본 신아영은 순간 굳어졌다. 벌겋게 부은 눈을 보니 조금 전까지 울었던 모양이었다.
“지원아? 네가 여긴 어떻게...”
“아영 언니...”
윤지원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차분하게 물었다.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해도 돼요?”
거실은 어수선했고 테이블 위에는 먹다 만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윤지원은 옅게 웃으며 곧장 본론을 꺼냈다.
“오빠 대신 사과하러 왔어요. 언니 생일을 잊은 건 오빠가 잘못한 거예요.”
신아영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빠가 언니를 사랑하지 않는 건 절대 아니에요. 오빠는 어릴 때부터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어요. 언니가 헤어지자고 했다면서... 지금 혼자 술집에서 속상한 마음을 달래고 있어요.”
윤지원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언니, 오빠한테 가 봐요...”
지난 생에서 윤주혁은 윤지원과 결혼한 뒤에도 해마다 신아영의 생일이 돌아오면 혼자 술을 마시며 괴로운 마음을 달랬다.
윤주혁은 단 한 번도 신아영을 마음에서 지운 적이 없었다.
신아영은 윤지원을 바라보다가 문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눈물은 여전히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주혁 씨처럼 무뚝뚝한 사람한테 어떻게 너처럼 살가운 동생이 있을까. 지금 바로 갈게. 고마워, 지원아.”
윤지원이 윤주혁이 있는 술집을 알려 주자 신아영은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윤지원은 집을 나서는 신아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번 생에는 윤주혁과 하룻밤을 보내는 일도 없을 터였다.
집으로 돌아온 윤지원은 옷장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일기장을 꺼냈다.
윤지원이 열 살이던 해, 갈 곳 없이 거리를 떠돌던 윤지원을 열여덟 살이던 윤주혁이 집으로 데려갔다.
윤주혁은 다른 사람에게는 차갑고 무뚝뚝했지만, 윤지원에게만큼은 한없이 다정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알게 되었을 무렵, 윤지원은 자신이 윤주혁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평생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짝사랑이었다.
윤지원은 일기장을 펼친 뒤 한 장씩 뜯어 갈기갈기 찢었다. 잘게 찢은 종잇조각들을 변기에 버린 뒤 물을 내려 흔적도 없이 흘려보냈다.
두 시간쯤 지난 뒤, 현관문이 열렸다.
신아영은 술에 잔뜩 취한 윤주혁을 부축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윤주혁은 신아영을 품에 꽉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혀가 꼬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영아... 헤어지자고 하지 마... 내가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어...”
신아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몇 번이고 윤주혁을 달랬다.
“알았어, 알았어. 헤어지자고 하지 않을게.”
윤지원을 발견한 신아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원아, 미안한데 해장국 좀 끓여 줄래? 나는 주혁 씨부터 방에 눕히고 올게.”
“네, 언니.”
신아영은 윤주혁을 부축해 침실로 들어갔다.
윤지원은 주방에서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침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응석을 부리는 윤주혁의 목소리 사이로 신아영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난 생에서 윤주혁이 윤지원에게 신아영을 처음 소개했을 때, 윤지원은 두 사람이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신아영은 밝고 당찬 데다 좋은 집안에서 자라 교양까지 갖춘, 완벽에 가까운 여자였다.
게다가 윤주혁의 동생인 윤지원에게도 늘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아영 언니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나 때문이 아니었다면 아영 언니는 죽지 않았을 거야. 오빠와 아영 언니도 행복하게 살았겠지. 이번 생에는 꼭 만회할 거야.’
...
신아영은 밤새 윤주혁의 방에 머물며 윤주혁을 보살폈다.
다음 날 아침, 윤지원이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윤주혁은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윤주혁은 계란 프라이를 만들고 우유를 데운 뒤 식빵을 삼각형으로 잘라 접시에 담았다.
아침 식사를 모두 준비한 윤주혁은 신아영 앞에 음식을 차려 놓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식기 전에 얼른 먹어.”
신아영은 웃으며 윤주혁의 팔을 쿡 찔렀다.
“언제부터 이렇게 다정해졌어? 아침 식사도 챙길 줄 알고?”
윤주혁은 신아영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지난 생에서 윤주혁은 윤지원과 결혼한 뒤에도 종종 윤지원을 위해 요리해 주곤 했다.
윤지원이 생리할 때면 진통제를 사다 주기도 했다.
윤지원은 계단 앞에 멈춰 서서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지원아, 이리 와서 아침 먹어.”
신아영이 윤지원을 불렀다.
윤주혁은 고개를 들어 윤지원을 무심히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고, 표정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윤지원이 식탁 앞에 앉자, 윤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칸 떨어진 의자로 옮겨 앉았다.
제2화
윤주혁은 마치 낯선 사람이라도 보는 듯 윤지원을 바라보았다.
차갑고 매서운 눈빛을 마주한 순간, 윤지원은 지난 생에서 윤주혁에게 빈손으로 내쫓겼던 기억이 떠올랐다.
윤지원은 식빵 한 조각을 입에 욱여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난 다 먹었어. 학교에 수업이 있어서 먼저 갈게.”
신아영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 우유도 아직 안 마셨잖아...”
“괜찮아요, 언니. 이미 늦었어요.”
윤지원은 가방을 집어 들고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윤지원은 온종일 도서관에 머물며 유학 정보를 찾아보고 지원서를 작성했다.
지난 생에서는 윤주혁의 곁에 남기 위해 어렵게 얻은 유학 기회마저 포기했었다.
‘이번 생에는 아주 멀리 떠나서 오직 나를 위해 살 거야.’
저녁에는 기숙사에서 묵을 생각이었지만, 신아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지원아, 집에 와서 저녁 먹어. 할 말이 있어. 아주 중요한 이야기야.”
집에 도착하자 윤주혁이 문을 열어 주었다.
문 앞에 선 윤지원을 본 윤주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뭐야? 왜 온 거야?”
반응만 보아도 윤주혁이 집으로 부른 게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아영 언니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왔어.”
윤지원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아영이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지원아, 왔어?”
신아영은 윤지원을 소파에 앉히고 손에 리모컨을 쥐여 주었다.
“TV 보고 있어. 금방 저녁 차릴게!”
윤주혁은 주방에서 신아영의 저녁 준비를 거들고 있었다.
윤지원은 유리문 너머로 고개를 숙인 채 신아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윤주혁을 지켜봤다.
윤주혁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고 신아영을 바라보는 눈빛은 더없이 다정했다.
윤주혁은 윤지원을 위해서도 직접 요리하곤 했었다.
윤지원이 열이 날 때면 밤새 곁을 지키다가 아침이 되면 흰죽을 끓여 주곤 했다.
그리고 윤지원의 생일에는 잡혀 있던 약속까지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와 상다리가 휘도록 음식을 가득 차려 주곤 했다.
“지원아, 뭘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어?”
신아영은 넋을 놓고 있던 윤지원을 보더니 윤주혁을 주방 밖으로 밀어냈다.
“나가서 지원이랑 이야기하고 있어. 이제 국 하나만 끓이면 되니까 내가 할게.”
윤주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닦은 뒤 윤지원과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일인용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멀찍이 떨어져 앉은 두 사람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점점 짙어졌다.
TV에서는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화면을 보지 않았다. 시끄러운 웃음소리만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지원아.”
윤주혁이 갑자기 입을 열자, 윤지원은 고개를 돌렸다.
윤주혁은 무거운 눈빛으로 윤지원을 바라봤다.
“공부 열심히 하고 착실하게 살아. 해서는 안 될 생각은 하지 말고.”
누군가 심장을 사정없이 움켜쥔 듯 가슴이 조여 들었다.
‘해서는 안 될 생각이라니. 오빠를 좋아하는 마음이... 품어서는 안 되는 감정이라는 건가.’
지난 생에서 윤주혁은 윤지원의 일기장을 발견한 뒤 차갑게 말했다.
“윤지원, 너 정말 역겨워.”
그때 윤주혁은 윤지원이 일부러 자신과 신아영의 관계를 망가뜨린 데다, 분수도 모르고 더 많은 것을 탐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지원은 윤주혁을 좋아했을 뿐, 신아영에게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을 만한 말은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윤주혁은 믿지 않았다.
“알았어.”
윤지원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지 않을게.”
식사 도중 신아영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기쁜 소식을 전했다.
“주혁 씨가 오늘 나한테 프러포즈했어!”
신아영이 왼손을 내밀자, 약지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가 조명 아래에서 반짝였다.
“축하해요.”
윤지원은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오빠, 언니. 행복하게 사세요.”
윤주혁은 젓가락질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들어 윤지원을 바라보았다.
윤지원은 못 본 척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계속했다.
식사가 끝난 뒤 윤지원은 먼저 일어나 설거지를 시작했다.
거실에서는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신아영이 결혼식 계획을 이야기할 때마다 윤주혁은 나직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맞장구를 쳤다.
설거지를 마친 윤지원은 손에 묻은 물기를 닦고 거실로 나가 학교에 일이 생겨 먼저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려 했다.
거실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 윤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원이가 졸업하면 나가 살게 하자. 학교 근처에 오피스텔 하나 사 주면 돼. 다 큰 여자애가 계속 우리랑 같이 사는 것도 불편하잖아.”
신아영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 살면 위험하지 않아? 둘은 남매인데 같이 사는 게 뭐가 어때서?”
윤주혁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원이도 이제 다 컸으니, 우리도 사생활을 존중해 줘야지. 우리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윤지원은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서 있다가 더는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발소리를 죽인 채 이층으로 올라간 윤지원은 가방을 챙겨 조용히 집을 나섰다.
집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뒤에야 신아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언니, 학교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먼저 돌아갈게요. 오빠랑 언니도 안녕히 주무세요.]
윤지원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집을 나가 사는 편이 오히려 나았다.
윤주혁에게서 멀어질수록 안전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사흘 뒤, 윤지원은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다가 문득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지난 생에서 신아영은 골육종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병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말기였다.
그렇다면 지금도 신아영의 몸속에는 이미 암세포가 생겼을 가능성이 컸다.
제3화
윤지원이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요란한 소리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사과할 겨를도 없이 도서관을 뛰쳐나온 윤지원은 달리면서 신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영 언니, 오늘 오후에 시간 있어요? 커피 한잔 사 드리고 싶어요.”
카페에서 윤지원이 함께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 달라고 부탁하자 신아영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지원아, 갑자기 웬 건강검진이야? 어디 아파?”
윤지원은 다급히 핑계를 지어냈다.
“학교에서 받으라고 해서요. 언니, 저 혼자 가기 무서워서요. 같이 가 주면 안 돼요?”
신아영은 미심쩍은 눈으로 윤지원을 바라봤다.
“정말이야?”
윤지원은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예요. 그리고 언니도 함께 검사받았으면 좋겠어요. 뭐랄까... 혼전 건강검진이라고 할까요? 이제 오빠와 결혼할 예정이잖아요.”
신아영은 민망한 듯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너도 참...”
그때 신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윤주혁이었다.
“어디야?”
“지원이랑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있어.”
잠시 침묵하던 윤주혁이 짧게 말했다.
“일찍 들어와.”
전화를 끊은 신아영은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껌딱지라니까.”
윤지원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린 뒤 학교에 수업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주말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학교 정문 앞에는 윤주혁의 차가 세워져 있었다.
차에서 내린 윤주혁은 다짜고짜 윤지원의 손목을 움켜잡고 담벼락 쪽으로 끌고 갔다.
윤지원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윤주혁은 붙잡고 있던 손목을 거칠게 놓았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던 윤지원은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화끈거리는 무릎과 팔꿈치를 내려다보니 살갗이 벗겨진 자리마다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윤주혁은 싸늘한 눈으로 바닥에 넘어진 윤지원을 내려다보았다.
“윤지원, 경고하는데 아영이한테서 떨어져. 괜한 말도 꺼내지 말고 쓸데없는 짓도 하지 마.”
윤지원은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킨 뒤 떨리는 목소리로 해명했다.
“아니야. 난 그냥 아영 언니한테 같이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 달라고 부탁했을 뿐이야.”
윤주혁은 순간 멈칫했다.
“어디 아파?”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윤지원은 잠시 굳어졌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고... 학교에서 받으라고 한 거야.”
윤주혁은 한동안 윤지원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굳어 있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했지만, 윤주혁의 눈빛에는 여전히 윤지원의 말을 의심하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잠시 후 윤주혁은 몸을 낮춰 윤지원의 무릎에 난 상처를 살폈다.
“차에 타.”
윤주혁은 윤지원을 데리고 약국으로 가 소독약과 거즈를 산 뒤, 길가에 쪼그려 앉아 상처에 약을 발라 주었다.
손길은 다정하지 않았지만 상처를 닦고 거즈를 붙이는 동작만큼은 무척 꼼꼼했다.
윤주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말에는 나도 같이 갈게. 너희 둘 다 검진받아.”
윤지원은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바라보았다.
어느새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흐릿하게 번졌다.
검사 결과가 나온 날, 신아영은 충격을 받은 듯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흘렸다.
진단 결과는 초기 골육종이었다.
의사가 설명했다.
“다행히 아주 일찍 발견됐습니다. 완치율도 매우 높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윤주혁은 신아영을 품에 끌어안았다. 자칫 신아영을 잃을 수도 있었다는 두려움에 두 손까지 덜덜 떨었다.
신아영은 눈시울을 붉힌 채 윤지원을 바라봤다.
“지원아, 고마워... 정말 고마워.”
윤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신아영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윤주혁의 시선이 신아영의 어깨 너머로 윤지원에게 향했다. 깊고도 무거운 눈빛이었다.
윤지원은 지난 생에서 신아영이 세상을 떠난 날을 떠올렸다. 온종일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윤주혁은 신아영이 윤지원과의 하룻밤을 알고 미련 없이 곁을 떠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뒤, 신아영의 묘 앞에서 온몸이 흠뻑 젖은 채 하루 종일 서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윤주혁은 눈에 보이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부수다가 윤지원이 서랍 맨 아래 숨겨 둔 일기장을 발견했다.
그는 윤지원이 일부러 자신과 하룻밤을 보낸 사실을 신아영에게 알렸다고 확신했다.
윤지원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윤주혁은 믿지 않았다.
윤주혁은 윤지원과 이혼한 뒤 빈손으로 내쫓았을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도록 앞길까지 막았다.
결국 윤지원은 곁을 지켜 주는 사람 하나 없이 월세방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아영 언니는 살아남을 거야. 그렇게 되면 오빠가 나를 원망할 일도 생기지 않겠지. 그리고 나는 떠날 거야.’
가슴을 짓누르던 짐을 마침내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검사와 진료를 모두 마쳤을 무렵,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윤주혁이 입원 수속을 밟으러 간 사이 윤지원과 신아영은 병원 로비에 앉아 기다렸다.
신아영은 윤지원의 어깨에 기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원아, 나 무서워.”
윤지원은 신아영의 손을 가볍게 토닥였다.
“무서워하지 마요. 오빠가 있잖아요. 언제나 언니 곁을 지켜 줄 거예요.”
...
신아영은 곧바로 입원했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후에는 항암 치료가 이어졌다.
윤주혁은 모든 업무를 미룬 채 날마다 병원에 머물며 신아영을 간호했다.
윤지원은 학교와 병원을 오가는 동시에 유학 서류까지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어느 날 병원에서 함께 집으로 돌아온 뒤 윤주혁이 윤지원을 불러 세웠다.
제4화
“윤지원.”
윤지원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윤주혁은 주소가 적힌 메모지 한 장을 내밀었다.
“학교 근처에 오피스텔을 하나 마련했어. 방이 두 개고 거실도 따로 있어. 인테리어도 다 끝났으니까... 되도록 빨리 이사해.”
윤지원은 순간 굳었지만 곧 메모지를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따져 묻지도, 망설이지도 않았다.
윤주혁은 윤지원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려는 듯 한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윤지원은 아무렇지 않은 듯 메모지를 챙긴 뒤 몸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갔다.
다음 날 윤지원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물건 대부분은 기부하거나 버릴 생각이었다.
새 오피스텔에 필요한 물건은 모두 새로 장만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윤지원은 날이 갈수록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고 식사 때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방 안의 물건도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다. 책장과 옷장은 텅 비었고 화장대 위에는 보석함 하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어느 날 밤, 윤지원은 열 시가 훌쩍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윤주혁은 불도 켜지 않은 채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담뱃불만 붉게 타올랐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늦었네.”
윤주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뭐 하고 다녀?”
신발을 벗던 윤지원이 잠시 멈칫했다.
“학교에 볼일이 있었어.”
윤지원은 신발을 마저 벗고 곧장 방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윤주혁이 유리잔을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아영의 항암 치료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치료를 시작한 지 석 달이 지난 뒤, 의사는 상태가 어느 정도 호전되었으니 집에서 요양하며 정기적으로 검진만 받으면 된다고 말했다.
신아영이 퇴원하는 날에는 윤지원도 병원을 찾았다.
신아영은 눈에 띄게 야위었지만 표정은 밝았고 활기가 넘쳤다.
윤주혁이 퇴원 수속을 밟으러 간 사이, 윤지원과 신아영은 병실에서 함께 기다렸다.
“지원아...”
신아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
“너랑 주혁 씨... 혹시 싸웠어?”
윤지원은 순간 굳었고 신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혁 씨가 요즘 유난히 예민해. 회사 사람들도 주혁 씨만 보면 피해 다닌대.”
윤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아영은 윤지원의 손을 꼭 잡았다.
“주혁 씨가 너한테 나가 살라고 한 것도 알아. 내가 한바탕 혼내 줬어. 걱정하지 마. 내가 있는 한 우리 집은 언제까지나 네 집이기도 해.”
윤지원도 신아영의 손을 마주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언니, 저도 이제 다 컸어요. 제 사생활을 존중해 주세요. 그리고 지금 유학을 준비하고 있어요. 내년쯤 떠날 거예요.”
신아영은 눈을 크게 떴다.
“유학? 어디로? 얼마나?”
“영국이요.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이에요. 최소 3년은 머물 것 같아요.”
신아영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그러면 혼자 해외에 있는 동안 몸 잘 챙겨야 해. 무슨 일 생기면 꼭 우리한테 말하고, 알았지?”
“네.”
신아영은 눈가를 닦다가 문득 웃었다.
“지원아, 내가 아는 사람 소개해 줄까? 내 대학 후배인데 건축 설계 일을 해. 성격도 정말 좋아.”
윤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언니.”
“뭐가 괜찮아? 혼자 지내면 외롭잖아.”
윤지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요즘 알아 가는 사람이 있어요.”
“뭐?”
신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유학 준비를 하다가 알게 됐어요. 같은 학교에 같이 지원하려고 해요.”
신아영은 눈을 반짝이며 손뼉을 쳤다.
“정말 잘됐다! 주혁 씨한테도 알려야겠어. 우리가 먼저 어떤 사람인지 만나 봐야지. 나쁜 사람한테 속으면 안 되잖아!”
“그러실 필요까지는...”
윤지원이 말리려 했지만, 신아영은 벌써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어? 주혁 씨 왔네.”
신아영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병실 문을 바라봤다.
윤주혁이 퇴원 서류를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
두 사람이 맞잡고 있는 손을 본 윤주혁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
윤주혁은 가까이 다가와 자연스럽게 신아영의 어깨를 감쌌다.
신아영은 반짝이는 눈으로 윤주혁을 올려다봤다.
“방금 지원이한테 남자 소개해 주겠다고 했는데, 지원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윤주혁은 윤지원을 힐끗 바라본 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히 거절했겠지.”
“맞아. 소개받는 건 싫대.”
윤주혁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래?”
이어 별일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지원이는 어릴 때부터 나만 졸졸 따라다녔어. 대학생이 돼서조차 독립하기 싫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연애하려고 하겠어?”
신아영이 웃으며 말을 끊었다.
“그런데 지원이한테 벌써 알아 가는 사람이 생겼대. 같은 학교에 지원할 생각이라는데?”